고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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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의 삼국시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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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본격적으로 한강 유역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광개토왕대이다. 고구려는 그동안 한반도 중부지역에 진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으나, 백제의 견제에 의해 실패하고 있었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고,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어서 경제적인 이점도 많았다. 한강 유역 진출은 강원도 영서지역으로의 진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지역을 매개로 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으로의 진출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백제와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의 유이민들에 의해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정치사회적으로 공통된 부분이 많다. 부여의 건국신화를 동명신화라하며, 고구려의 건국신화 역시 동명신화 또는 주몽신화라 한다. 백제의 건국설화 역시 동명설화로 부르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낙랑과 대방이 축출된 이후 서로의 완충지대가 없어지면서 대립하였을 것이다. 팽팽하게 긴장이 지속되던 관계는 고구려의 고국원왕 39년, 백제의 근초고왕 24년에 폭발하였다.

 

1) 고국원왕 39년(369년) 가을 9월에 군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치양(雉壤) 에서 싸우다가 패하였다.

2) 근초고왕 24년(369년)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양국 간의 충돌사건에 대하여 백제측의 기록이 보다 상세하다. 이에 의하면 고구려가 먼저 백제를 공격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당시 백제는 근초고왕대에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영역 확장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반면에 고구려는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원왕이 전사하고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소수림왕이 즉위하자마자 불교 공인과 율령 반포, 태학 설립을 통하여 체제정비를 수행한 후, 다시 광개토왕대에 적극적인 정복활동을 벌이게 되었고, 특히 백제 정벌에 적극성을 보였다.

 

광개토왕 즉위년(391년)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이름이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태어나서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로 책립되었고, 9년에 왕이 서거하여 태자가 즉위하였다.6)

광개토왕 2년(392년) 가을 8월에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범하니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막았다.

광개토왕 3년(393년) 가을 7월에 백제가 침략해오니 왕이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맞받아쳐서 이를 패배시켰다. 나머지 적들은 밤에 달아났다.

8월에 나라 남쪽에 7성을 쌓아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광개토왕 4년(394년) 가을 8월에 왕이 패수(浿水)위에서 백제와 싸워 이를 크게 패배시켰다. 사로잡은 포로가 8천여 급이었다.

 

위의 사료들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와 백제의 접촉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고국원왕 사망 이후 소수림왕 때 세번, 고국양왕 때 한 차례 백제를 공격하고 있다. 이 당시 백제도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특히 소수림왕 때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서 3만이라는 군대를 동원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국양왕은 백제로부터 두 차례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서로 공수 양면으로 대응하던 고구려와 백제는 이제 위의 사료에 보이는 바와 같이 고구려가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접전을 하고 있다. 이후의 기사는 광개토왕비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국원왕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오갔던 공방전은 고구려가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영락(永樂) 6년 (396년)  6년(396) 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등을 攻取하고, 그 首都를 하였다. 百殘이 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註 036 건너 精兵을 보내어 그 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主가 困逼해져, 男女生口 1천 명과 細布 천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신출자愼(息愼, 肅愼) 土谷을 觀察, 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莫□羅城 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신출자愼은 고구려 조정에) 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命을 받았다.

 

위 비문 광개토왕 6년 (396: 백제 아신왕5년)의 기사를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한강 유역에 진출한 내용이다. 이때 아리수를 건너 백제 수도를 핍박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한강 유역의 성들을 공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광개토왕은 수군을 직접 이끌고 한강을 건넌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고구려가 획득한 58성과 관련된 지역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이를 예성강 이하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이르렀다고 보는 설7)과 상당수의 성이 남한강 상류 유역에 있었다고 보는 설8)이 있다. 이 지역을 언제 어떻게 확보했는가는 광개토왕이 영락 10년에 신라에 원병 5만을 파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고구려는 이 지역을 확보하면서 한강 유역에 대한 전략적인 가치를 더욱 인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에서는 광개토왕대와 장수왕대에 고구려가 우위를 점하였다.

광개토왕릉비를 신라와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다음의 것이 있다.

 

영락 9년(399년) 己亥에 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倭人이 그 國境에 가득차 城池를 부수고 奴客으로 하여금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영락 10년(400년) 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男居城을 거쳐 新羅城(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 從拔城에 이르니 城이 곧 항복하였다. 安羅人戍兵 …… 新羅城 □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字 중 거의 대부분이 不明.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任那加羅地域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朝貢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399년의 내용은 백제가 3년 전에 취한 행동의 내용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백제는 당시 정세를 확보하기 위해서 倭와 내통하고 이에 따라 백제와 가야-왜의 동맹군을 결성하였다. 광개토왕은 이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에서 평양까지 내려왔다.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 지역인 國內城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남동쪽의 변경지역에 성을 구축하고 평양의 民戶를 옮겨서 본격적으로 지배하였다. 고구려가 국동 쪽에 여섯 곳의 성을 쌓은 것은 백제에 대한 견제인 동시에 신라로 통하는 내륙 교통로의 도로망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9) 평양을 중심으로 한 여섯 곳의 성을 쌓은 것은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대한 진출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광개토왕이 평양으로 순행을 하고10) 그곳에서 신라의 사절도 함께 맞이하고 있는 점에서 평양은 이미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399년 신라 사신이 전한 신라의 다급한 사정에 대해 광개토왕은 군사 5만을 보냈는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이때 파견된 고구려군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 부근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군은 왜군을 추격하여 낙동강에 있는 임나가야에까지 이르러 종발성을 함락시키고 군대를 두어 지키게 하였을 뿐 아니라, 계속 백제와 왜·가야연합군을 격파하였고, 지키는 군대를 두었다고 한다.11)

이 때 광개토왕은 신라 구원을 명분에 두었지만 실제로는 신라 뿐 아니라 임나지역까지 주둔군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려고 하였다. 고구려는 이를 계기로 하여 죽령 동남쪽 일부 지역을 자신들의 세력권내에 포함시켰다.

 

내물이사금 37년(392년)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내물이사금 38년(393년) 여름 5월에 왜인(倭人)이 와서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내물이사금 46년(401년) 가을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實聖)이 돌아왔다.

 

위의 사료에 의하면 고구려와 신라는 4세기 후반에 이미 접촉을 하고 있다. 우선 고구려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이에 대한 외교적인 대응으로 신라에서 볼모를 보낸 것은 서로의 존재와 상대방의 국력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미 사신이 오고가는 교통로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해안쪽의 서라벌에 치우쳐 있던 신라가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 사신을 보내거나 맞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교통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우선 내륙 교통로는 빠른 지름길이기는 하나, 한반도 중부 내륙에 말갈이 존재하고 있으며,12) 한강 하류와 그 일대는 백제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았다. 신라는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우회도로를 통해서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갔을 것이다.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동해안 일대로 영역을 확장해 갔으며, 4세기와 5세기초에는 이미 하슬라 지역을 영역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이렇게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볼모를 받으면서 그 이전과 달리 한반도 중부지역 특히 한강 유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을 것이다. 이들이 통과했던 교통로 가까이에는 백제 영역도 접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396년 광개토왕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직접 백제를 공격하는 군사행동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는 왜군을 격퇴시키기 위한 신라 구원 요청을 명분으로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우선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압록강 중류지역보다 넓은 평야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반도 중부지역 이남의 온난한 기후 등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우선 경제적인 요건에 관심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있다.

춘천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영서지역이 언제 고구려에 편입되었을까.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9주를 설치하였다. 고구려의 옛지역에는 한주(漢州)와 삭주(朔州), 명주(溟州)를 두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강원도 지역이 세 주에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 강원도 지역은 연혁을 언급할 때 거의 다 고구려의 ○○군이었거나 ○○현이었다고 표기하고 있어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본기의 고구려 백제 신라본기에는 실직이나 하슬라, 우수주 등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오지 않고 한두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반면에 신라와 백제의 초기 기록과 3~4세기경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말갈과 관련된 자료가 보인다.

말갈은 그동안 그 실체에 관해서 논의를 많이 해왔으나 분명한 정설은 없다. 다만 한반도 특히 중부지역 강원도 동쪽과 서쪽에 거쳐서 존재했던 세력으로 간주하고 있다.13) 즉 신라나 백제가 이 지역으로 본격적인 영역을 확장해 나가기 이전에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 세력은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포함해서 한반도 중부에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서 존재했다.

강원도 지역은 한반도 중부와 동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고구려는 물론이고 백제와 신라의 중심부에서도 비켜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가 한반도 중남부로 진출하기 위해서 그리고 백제가 가야나 신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라가 북부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이것은 강원도가 한강의 상류지역인 북한강과 남한강 수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동해안 교통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6) 삼국사기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즉위년조​

7) 노중국, 한성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변태섭박사 화갑기념논총』, 1986.

8) 이도학, 영락6년 광개토왕의 南征國原城」『손보기 박사 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 1998.

9) 삼국사기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18(408년조)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禿山) 6성을 쌓고, 평양백성들의 살림집을 옮겼다.

10) 삼국사기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18(408년조) 가을 8월에 왕이 남쪽 지방을 돌아보았다.

11) 400년 당시 고구려군이 가야지역에 진출하면서 철갑 무기 등을 남겼다. 오늘날 가야지역의 고분에서 철 갑옷이나 말의 무기가 나오는 것은 이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12) 삼국사기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 40(395). “가을 8월에 靺鞨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내어 이를 悉直 벌판에서 크게 쳐부수었다라는 기록과 같이 말갈이 버티고 있어서 왕래하기 곤란하였을 것이다

13) 문안식, 『한국고대사와 말갈』, 2003, 혜안. 문안식은 강원도 영서지역에 존재하는 말갈은 貊系 靺鞨, 동해안지역에 존재했던 말갈은 濊系 靺鞨이라고 주장하였다. 맥계 말갈은 고구려의 유이민 세력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한강 중상류 유역에 잔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