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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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의 삼국시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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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서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신라의 역학관계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관련 사료가 거의 없고, 신라본기에만 단편적으로 보일 뿐이다.

 

1) 파사왕 23년(A.D. 99년) 실직국(悉直國)과 압독국(押督國) 두 나라 왕이 항복하였다.

2) 아달라왕 3년(A.D.156년) 계립령(鷄立嶺)의 길을 열었다.

3) 아달라왕 5년(A.D.158년)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하였다.

4) 기림왕 3년(300년) 2월에 비열홀(比列忽)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몸소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와서 항복하였다.

5) 내물왕 40년(395년)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군사를 내어 그들을 실직(悉直)의 들판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6) 내물왕 42년(397년) 가을 7월에 북쪽 변방 하슬라(何瑟羅)에 가뭄이 들고 누리의 재해가 있어 흉년이 들었으며 백성들이 굶주렸다.

7) 눌지왕 22년(438년) 여름 4월에 우두군(牛頭郡)에 산골 물이 갑자기 불어 50여채의 집이 떠내려갔다.

8) 눌지왕 34년(450년) 가을 7월에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 성주 삼직(三直)이 군사를 내어 불의에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9) 자비왕 11년(468년)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 실직성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 사람으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니라(泥河)에 성을 쌓았다(泥河를 泥川이라고도 한다).

10) 소지왕 3년(481년) 봄 2월에 比列城에 거둥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솜을 넣어 만든 군복을 내려 주었다.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쫒아가 니하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11) 소지왕 18년(496년) 가을 7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해 왔다. 장군 실죽(實竹)이 나아가 니하 가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다.

12) 지증왕 6년(505년)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13) ㈀ 진흥왕 12년(551년) 왕이 居柒夫(거칠부) 등에 명하여 고구려를 침입하여 승세를 타 10郡을 취하였다.4)

    ㈁ (진흥왕) 12년에 왕이 거칠부 ... 8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략하도록 하였다. 백제인이 먼저 평양을 공파하니, 거칠부 등이 그 승리를 죽령 이북 高峴 이남의 10郡을 취하였다. 

14) 진흥왕 17년(556년) 가을 7월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

 

신라가 동해안 지역에 진출한 첫 기록은 파사왕 23년(99년)에 삼척으로 비정되는 실직국에 내항한 기사이다. 사실 이 기사의 기년과 내용을 그대로 믿기를 어렵지만, 적어도 동해안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로국과 실직국이 일정한 교류관계를 지속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어 아달라왕 3년(156년)과 5년(158년)에 계립령로와 죽령로를 개설하였는데, 이 역시 그 기년을 신뢰하기를 어렵다. 그러나 3세기초에 내륙 종단 교통로가 새로이 확장되기 때문에 계립령로와 죽령로의 개설은 3세기 초 무렵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기림왕 3년(300년)의 비열홀 순행기사와 소지왕 3년(481년)의 비열홀 거둥기사는 비열혼을 안변으로 비정한다면, 이 지역이 당시에 신라의 영역 내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기림왕 3년(300년)의 우두주 태백산에서 망제를 올린 기사 및 눌지왕 22년(438년) 우두군 홍수 기사 역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즉 우두주〔우두군〕는 춘천지역으로 3세기 말에는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고, 5세기 초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아마도 후대의 기사가 착오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다만 눈길을 끄는 것은 기림왕 3년(300년)의 기사로, 2월에 비열홀〔안변〕에 순행하고, 3월에 우두주에 이르렀다는 내용은 일련의 순행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순행 경로가 가능한 시기는 사료 13·14 기사에 보듯이 진흥왕대에 한강 상류의 6군 지역과 동해안 지역을 장악한 뒤이다. 따라서 기림왕 3년의 기사는 진흥왕대 혹은 그 이후의 기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신라가 동해안 지역을 둘러싸고 보이는 충돌의 주요한 지점을 실직성(삼척)과 하슬라(강릉)이며,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지만 니하 역시 중요 충돌지점이었다. 소지왕 3년(481) 경에는 고구려의 남진이 미질부(흥해) 지역까지 이르는 등 양국 간 세력의 소장(消長)이 빈번하였지만, 역시 4세기 이래 양국의 주된 접촉 지점은 삼척과 강릉 일대였다. 강릉과 삼척 지역이 완전히 신라의 손에 들어간 것은 6세기초 지증왕대로서 505년 삼척에 실직주를, 얼마 뒤에 강릉에 하슬라주를 설치하였다.5) 556년에는 동해안 지역에 비열홀주(안변)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동해안 일대에서 고구려와 충돌하였던 신라가 죽령로와 계립령로를 넘어 본격적으로 내륙 종단 교통로에 나섰다. 신라는 551년에 백제가 한강 하류지역을 회복하는 틈을 타서 죽령 이북에서 고현(高峴)까지의 10군을 공취하였다. 고현은 오늘날 강원도 회양군 철령(鐵嶺)지역이다. 이때 신라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상류지역을 차지하였다. 신라가 이때 차지한 10군의 지역적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10군에 해당하는 지역을 후일 우수주〔朔州〕 소속의 군현에서 찾아보자. 대략 철령 이남지역을 「지리지」에서 정리해 보면, 우수주(춘천)·평원군(원주)·나토군(제천)·근평군(가평)·양구군(양구) ·성천군(화천)·모성군(김화)·객연군(회양) ·대양관군(회양) 지역을 들 수 있다.

553년에 신라는 한강 하류지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아, 이곳에 새로운 주를 설치하였다. 이때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긴 지역은 지금의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 백제의 6군 지역일 것이다. 이에 백제는 이듬해에 성왕(聖王)이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 전투에서 新州 軍主인 金武力의 역공을 받아 성왕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였다. 그 결과 한강 하류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이 공고하게 되었다. ​

4) 삼국사기44 열전 거칠부전​

5) 삼국사기4 신라본기4 지증왕 13년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