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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의 삼국시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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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심을 흐르는 북한강 유역은 선사시대부터 인간의 삶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지역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다. 한국고대사에서 다양한 세력은 이 지역을 통과하거나 정착하면서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문헌에서는 그러한 자료들이 많은 편은 아니다. 국가가 발전하고 성장하면서 이 지역은 중심부에서는 먼 주변부로서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북한강 유역을 먼저 차지한 것은 삼국 중 백제가 먼저였다. 후에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에 의해서 지배를 받기까지 춘천을 중심으로 한 북한강 유역은 교차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춘천지역은 삼국의 두드러진 지배 외에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의 정치세력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도 상정해 볼 수 있다. 먼저 백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는 부여계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어 한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국력을 키워나가면서 기원 후 1세기에는 마한을 공격하고, 영역을 확장시켜 나아갔다. 이러한 백제는 한강 하류에서 영역을 확장하는 한편 북한강 중 상류 지역에 있던 춘천 지역으로도 영역을 확장하였다.

 

가-① (온조왕 13년 기원전 6년)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遷都)를 고하고 강역(彊域) 을 획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에 한하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大海)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 1 시조 온조왕 13년조).

  ② (온조왕 38년 기원 20년) 2월 왕이 순무(巡撫)하여 동쪽으로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 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는데, 다섯 달이 지나서 돌아왔다(『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 1, 시조 온조왕 38년).

 

지금까지 삼국사기에서 춘천에 관하여 거론되는 사료로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위의 두 사료이다. 여기에서 백제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동쪽으로 넓혀간 지역인 주양(走壤)이 춘천일 것으로 추측되어 왔으며, 아직도 이에 대해서 수긍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백제가 건국 초기인 기원전 6년이나 기원후 20년에 이곳에까지 영역확장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들어 사료에 대한 신빙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한편 최근에 들어서는 『삼국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말갈(靺鞨)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강 유역에 존재했던 정치체(政治體)에 기울이고 있다. 이 문제는 ''춘천 맥국(貊國)설''과 관련하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춘천에는 맥국(貊國)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였다는 것인데, 그 존재기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 실정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맥국이 신라 선덕왕 6년인 637년까지 독자적으로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지가 현재의 발산리 지역일 것으로 상정하기도 한다.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많은 정치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條)에 의하면 마한 54개국, 진한과 변한에 20여개국의 이름의 거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러한 상황은 쉽게 상정이 된다. 아마도 춘천지역에도 어떠한 정치체가 존재하였을 것은 틀림없다. 북한강 유역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지역 자체가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먼저 백제가 영역으로 확보하였을 것은 쉽게 상정할 수 있다. 따라서 앞의 사료와 같은 내용도 언급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에 진출 하여 백제의 많은 성과 촌을 정복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영역에 침투한 왜를 격퇴시켜달라는 신라의 요청으로 5만의 군대를 동원한 기록이 광개토왕릉비문에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5세기 초에 이 지역은 고구려의 정치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한반도 남쪽으로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러한 시도의 결정적인 행동이 475년에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략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춘천지역은 이미 5세기대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그 지배하에 있 었을 것이다. 방동리 고분의 양식이 고구려의 전통 분묘양식인 말각조정방식(모줄임 방식)이 라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춘천지역은 북한강 중상류 유역에서 거점지역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독자적인 성격을 가진 토착세력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춘천지역의 지형적인 조건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정치력이 약했다가 보다는 영역으로서 확보를 하여, 루트로서 활용하기는 하였지만 이 지역의 인구밀도나 산업 등을 고려해 볼 때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에서 파견할 정도는 아니라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한반도 중부 지역에 존재하던 말갈이 상정된다. 『삼국사기』에서 말갈은 자주 고구려의 부용(附庸)세력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실이 그들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상정하게 한다.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로 인하여 이 지역이 신라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기 전에는 춘천은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 세력이 맥국으로 인식된 것은 아닐까. 우리 역사에서 예맥(濊貊)은 부여나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고 구려에 관해서는 주로 맥(貊)과 관련하여 생각해 왔는데, 그렇다면 춘천이 맥국이었다고 인식된 것은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게 된 후의 역사인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혼재되어 사료에 보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튼 춘천지역에 존재하던 세력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격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 소위 “중도식 토기”에 의해서 그 사실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춘천지역에는 백제식 토기이든 고구려식 토기이든 그것이 압도적으로 차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묘제도 고구려식의 적석총이나 말각조정식이 규모나 수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고구려나 백제의 세력이 지배적이지 못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의 세력이 존재하였을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 비추에 볼 때 이것이 이 지역에서 맥국으로 전해져 오는 것일 수 있다.

그동안 맥(貊)은 흔히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세력이나 이 지역을 지칭할 때 말갈로 칭하던 것을 고구려가 지배하게 된 이후에는 착종되어 사용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고구려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 것은 4세기 말 이후 빠르면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남하할 때 하나의 루트로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고구려가 남하하는 루트는 평강고원을 거쳐 회양 등 북한강의 수계를 따라서 왔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을 것이다. 특히 가평이나 춘천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백제의 영향권 하에 있던 변두리 세력으로서 먼저 고구려가 통과하면서 그 지배하게 들어가게 되었으며, 고구려가 아직 천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간접지배를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정치 문화의 영향의 결과가 방동리 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험한 지리적인 형세에 의해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계(水系)를 이용하였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평야지대가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농업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이 거점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루트로서의 역할을 수행 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남한강 유역의 비옥한 지역과 비교해 보아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춘천지역은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신라가 한강 이북으로 진출할 때 다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며, 신라의 군주가 파견되기에 이른다.

 

나- ① 선덕왕 6년(637년) 당(唐) 정관(貞觀) 11년에 우수주(牛首州)로 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혹은 문무왕 13년(673년) 唐 咸平 4년에 수약주를 설치하였다고도 한다)(『삼국사기』 권35, 雜志 4, 지리 2).

   ② 진덕왕 원년(647년) 2월 대아찬 수승(守勝)으로 우두주(牛豆州) 군주를 삼았다(『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5, 진덕왕조) .

 

사료 나-①은 진흥왕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이후,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이 지역이 하나의 루트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신라는 진흥왕 이후 북방으로 팽창하던 시기에 조령과 죽령의 루트를 확보하고, 선덕왕 6년 (637년)에 우수주로 하고 군주를 두게 된다.

그 이후 문무왕 때에는 서제(庶弟) 거득공(車得公)을 불러 “총재가 되어 두루 백관을 다스리고 사해를 널리 평안하게 하라”고 하였다. 거득공이 “폐하께서 만약 소신을 재상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신은 나라 안을 잠행하여 민간의 요역(?役)의 노일(勞逸), 부세(賦稅)의 경중(輕重), 관리의 청탁(淸濁)을 살핀 연후에 그 직(職)에 나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들어주었으며, 거득공이 서울 경주를 출발하여 하슬라주(명주), 우수주(춘주), 북원경(원주)을 거쳐 무진주(海陽)에 이르렀다.’ 결국 거득공이 돌아본 곳은 수도에서 거리가 먼 변경지역을 잠행하면서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하였던 듯하다. 이후 신라의 영역으로 존재한다. 춘천지역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묘제는 이러한 영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정치 적인 측면에서 골품제에 바탕을 둔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유교적인 정치를 심화시킨 것이었다. 왕권의 집행기관이던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으로 시중(侍中)이 설치된 것이며, 태종 무열왕이 비담(毗曇)과 알천(閼川)등 귀족 세력을 누른 것도 왕권 안정에 기여하였다. 특히 문무왕(文武王)을 거쳐 신문왕(神文王)에 이르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귀족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국학(國學)을 세워 유교 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9주 5소경을 두어 신문왕 5년(685년) 확대된 영토에 대한 지방 통치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때 설치된 9주는 사벌주, 삽량주, 청주, 한산주, 수약주, 하서주, 웅천주, 완산주, 무진주이다. 5소경은 북원경(원주),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이다. 당시 주(州)와 소경(小京)은 행정적인 의미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강하였는데, 이 당시에 설 치된 9주 가운데 춘천이 수약주(首若州)였다. 그러니까 춘천지역은 개편 전에 우수주였던 것이 이때 전국적인 행정제도 개편에 의하여 수약주(삭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9주는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각각 3주씩 두었고, 5소경은 군사 행정상의 요지에 설치하여 수도 경주의 지역적 편재성을 보완하고 중앙귀족과 지방귀족의 일부를 옮겨 살게 하였다. 주(州) 밑에는 군(117개)과 현(293개)을 두어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고, 외사정(外司正)이라는 감독관 을 보내 감찰의 임무를 맡겼다.

신문왕은 정무분담기구로서 통일 전에 두었던 6정(停)이라는 부대를 9개의 서당(誓幢: 중앙 군)과 10개의 정(停: 지방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9서당은 9州의 지방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통일신라 하대에는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권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패한 김주원과 같은 일부 세력들이 춘천지역으로 이주해 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의 왕권과 중앙집권화는 8세기 초의 성덕왕(聖德王 702∼737)과 8세기 중엽의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경덕왕 때에는 중앙관원과 지방 9주의 칭호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우리나라의 고유한 지명이 중국식 지명으로 바뀐 것이 이때부터이다. 즉 경덕왕 16년(757년) 12월에 전국의 주군명(州郡名)을 개정함에 따라 수약주는 삭주(朔州)로 고쳐져 1주·1소경·11군·27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신라말에 한 때 광해주(光海州)로 바뀌어 고려초까지 이 명칭으로 불리워졌다. 

8세기 중엽 경덕왕대까지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8세기 후반기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즉 중앙의 진골귀족들 사이에 권력쟁탈이 벌어지고, 지방에서는 지방대로 원심력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지방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지방 세력의 부류는 여러 부류가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이고 이들은 나중에 후삼국시대 를 열어간 장본인들이다. 궁예가 춘천지역을 장악한 후1) 신라의 군읍명이 비루하다 하여 모두 개명하였는데, 이때 춘천의 지명도 고쳐진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삼국시대에 춘천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일대는 수계에 의한 교통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철기시대부터 존재한 토착세력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언제부터 존재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좀더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 지역의 자연적인 요소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평야지대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 사회발전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가 팽창하면서 어느 시점에 한강 하류의 세력들이 중상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남쪽으로 그 팽창의 방향을 전환할 때 진출하는 루트 중의 하나가 평강과 회양을 지나는 북한강 상류의 수계에 의해서 남한강 수계 지역과 연결되어 일부는 충주로 진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영역으로 인식되면서 이 지역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세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 중 영서지역에 먼저 그 세력을 뻗치게 된 국가는 백제였다. 사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제가 북쪽 혹은 동북방향에서 낙랑 및 말갈과 빈번하게 충돌하고 있는 주된 접촉점은 서북쪽으로 지금의 경기도 적성 일대인 칠중하(七重河)에서 동북쪽으로는 부현(斧峴, 강원도 평강 일대), 동으로는 우두산성(牛頭山城, 강원도 춘천 일대)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문헌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동남쪽에서는 남한강을 따라 양평·여주를 거쳐 원주 일대까지 세력이 미치게 되었는데, 이는 원주 법천리 유적이 잘 보여주고 있다.1)이렇게 보면 당시 백제가 낙랑 말갈과 충돌하면서 확보해 가는 동쪽 경계는 3~4세기 무렵에는 강원도 회양 철원 춘천 홍천 횡성 원주 일대로 추정된다. 이것은 낙랑지역과 진한 지역을 연결하는 내륙 교통로와 중복된다.

백제는 이 교통로를 직접 활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강과 남한강 수계(水系)를 이용하여 춘천과 원주라는 거점지역을 장악한 후, 이 교통로를 적절히 통제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3세기 후반 중원의 혼란으로 낙랑군과 대방군의 통제력이 역화되다가, 4세기 초에는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이 멸망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마도 이 내륙 교통로는 그 기능을 잃어 갔을 것이고, 이 교통로를 통해 세력을 얻고 있었던 말갈도 그 세력이 약화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낙랑군 등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차지한 후 백제와 충돌하면서 한반도 내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였다. 4세기 중반경에 고구려와 백제의 충돌 지점은 황해도 신계 지역과 배천 일대로서 예성강의 상류와 하류 지역이었다.2) 

이 충돌지점은 곧 고구려의 두 개의 남하 경로와 관련해서 이해된다. 즉 수곡성인 황해도 배천에서 이어지는 경로는 배천-개성-한강 하류지역으로 이어지고, 황해도 신계에서 이어지는 경로는 신계-철원을 거쳐 한강 하류로 남하하는 길로 추정된다. 그 중 치양(雉壤, 황해도 신계)에서 이어지는 상류 경로는 철원에서 다시 가평-춘천-홍천-원주로 이어지는 내륙 종단 경로로 확장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는 광개토왕대의 남하과정에서 이 경로를 장악하면서 백제의 동쪽 영역을 빼앗고 동시에 신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광개토왕대에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하면서 경기 북부지역과 강원 영서 지역을 확보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광개토왕비의 영락 6년조 기사이다. 여기에는 당시 고구려가 공취한 58城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이 58성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다. 우선 58성을 예성강에서 한강 이북의 지역에 한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이 좁은 지역에 과연 58성이 전부 있었을지는 의문이 없지 않다. 다음으로 영락 6년 전쟁의 정복지를 예성강에서 임진강 사이와 경기만 일부, 그리고 남한강 상류지역에 소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당시의 정황을 고려한다면 가장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즉 영락 10년의 신라 구원 전에 5만에 달하는 군사를 동원한 고구려의 군사활동은 당시 상당히 안정적인 남하 경로를 확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경로로는 남한강 유역에서 죽령(竹嶺)을 넘는 경로가 가장 유력한데,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와 백제의 접촉지점이 황해도 일대임을 고려하건데, 이러한 남하 경로는 영락 6년 전투에서 획득하였다고 봄이 가장 타당하다. 그러면 이 견해를 받아들여 『삼국사기』권 37, 지리지4의 한산주·우수주 군현조에서 58성에 해당되는 지역을 찾아보자. 먼저 한산주(漢山州) 지역을 찾아보자. 58성 중 미추성은 곧 미추홀로 비정되는데, 곧 한산주의 매소홀현(인천)이다. 다음 혈구진(강화)도 영락 6년에 고구려에 공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접촉지점인 수곡성(水谷城, 황해도 신계) 이남 지역에서 한강 이북까지의 임진강·한강 하류지역에 해당하는 군현으로는 북한산군(서울 북부)·매성군(買省郡:경기도 양주)·비성군(臂城郡:경기도 고양)·철원군(강원도 철원)·부여군(夫如郡:강원도 김화)·우잠군(牛岑郡:경기도 금천)·대곡군(大谷郡: 황해도 평산) 등을 들 수 있다. 다음 남한강 일대에서는 국원성(國原城, 충주)을 비롯하여 잉근내군(仍斤內郡, 충북 괴산) 등을 들 수 있고, 금물노군(今勿奴郡, 충북 진천)이나 남천련(南川縣, 경기도 이천) 등도 포함될지 모르겠다.

다음 춘천 일대를 포함한 북한강 일대 지역도 고려하여야 한다. 이 지역의 장악도 한강 하류의 군사작전과 동시에 수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 우수주에서 해당되는 군현을 찾아보면, 우수주(牛首州, 춘천)·평원군(平原郡, 원주)·나토군(奈吐郡, 충북 제천)·근평군(斤平郡, 경기 가평)·양구군(楊口郡, 강원 양구)·성천군(狌川郡, 강원 화천) 등을 들 수 있다. 이상의 군현을 합하면 대략 16~18군, 30~40현 가까이 된다. 즉 총 50~60 정도의 군현이 된다. 이는 영락 6년조의 58성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3세기 전반기에 개설된 내륙 종단 교통로는 백제를 거쳐 고구려가 광개토왕의 군사작전을 통해 확보한 셈이라고 하겠다. 광개토왕의 군대가 신라에 구원군을 파견하고 가야지역을 압박하면서 한반도 동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교통로를 장악한 결과였다.​​

 

1) 최몽룡·권오영,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본 백제초기의 영역고찰,『천관우선생 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1985.

2) 삼국사기18 고구려본기6 소수림왕 5년조.

3) 이도학, 영락 6년 광개토왕의 南征國原城, 『손보기교수정년기념논총』, 1988, 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