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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춘천의 통일신라시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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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

신라국(新羅國) 고양조국사(故兩朝國師) 교시낭공대사(敎謚朗空大師) 백월서운지탑비명(白月栖雲之塔碑銘)과 아울러 서문.

문인(門人)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원사(知瑞書院事)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인연(崔仁渷)이 왕명을 받들어 짓고, 석단목(釋端目)이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기다. 

듣건대 진리의 경계는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며 현현(玄玄)한 진리의 세계로 가는 나루터는 멀고도 아득하니, 맑기는 푸른 바다와 같고 멀기는 높은 허공과 같도다. 분별의 배로써 어찌 그 끝까지 도달할 수 있으리오. 지혜(智慧)의 수레로써도 능히 그 끝까지 이를 수 없으니, 하물며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고, 범부(凡夫)의 어둠이 더욱 깊어져서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삐 없는 말처럼 떠도는 의식을 조복받기란 더더욱 어렵도다. 이로 인하여 헛된 것만 따라가고 진실을 저버리는 자들이 모두 축귀(逐塊)하는 뜻을 품고 유(有)에 고집하고 공(空)의 이치에 미혹한 이는 모두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잘못 알고 그 곳으로 쫓아가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만약 철인(哲人)이 출세(出世)하고 개사(開士)인 도사(導士)가 때때로 나타나 진종(眞宗)을 나타내며 참된 방편을 널리 선양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중중현현(重重玄玄)한 진리를 분석하여 중묘(衆妙)의 문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으리오.

그윽이 계주(髻珠)를 찾고 비밀리 심인(心印)을 전수하여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분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낭공대사(朗空大師)가 바로 그러한 분이시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행적(行寂)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주조(周朝)의 상보(尙父)인 강태공(姜太公)의 먼 후예이며, 또한 제(齊)나라의 정공(丁公)인 여급(呂伋)의 후손인데, 그 후 토군(兎郡)에 사신으로 왔다가 계림(鷄林)에 남게 되었으니, 지금의 경만(京萬) 즉 하남(河南) 사람이다. 할아버지의 휘(諱)는 전(全)이니, 세상의 영화를 모두 던져버리고 숨어 살면서 뜻을 지켰다. 아버지의 휘(諱)는 패상(佩常)이니, 9살 때 이미 관(冠)을 쓰고 약 삼동(三冬) 동안 공부하다가 자라서는 영원히 학문할 마음을 던져 버리고 무예(武藝)를 본받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름을 군려(軍旅)에 두고 무술(武術)을 익히는데 열중하였다. 

어머니는 설씨(薛氏)이니,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숙세(宿世)의 인연을 쫓아 아양(阿孃)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 하거늘, 꿈을 깬 후 그 영서(靈瑞)를 감득하고는, 그 일을 소천(所天)에게 낱낱이 여쭈었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비린내 나는 육류 등을 먹지 아니하며 정성을 다하여 태교를 하였다. 그 후 태화(太和) 6년 12월 30일에 탄생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골상이어서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불사(佛事)를 하였으니, 항상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풀잎을 따서 향으로 삼았다. 푸른 옷을 입는 어릴 때부터 학당(學堂)으로 선생을 찾았으며, 공부를 할 때에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잊었고, 문장(文章)에 임해서는 그 뜻의 근본을 총괄하는 예지가 있었다.

일찍부터 부처님 말씀을 깊이 믿었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떠나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아버지에게 고하되 “나의 소원은 출가수도(出家修道)하여 부모님의 끝없는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입니다”라 하니, 아버지 또한 숙세(宿世)부터 선근(善根)이 있어, 전날의 태몽과 합부(合符)하는 줄 알고는 그 뜻을 막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슬픔을 머금고 승낙하였다. 

드디어 머리를 깎으며 먹물 옷을 입고 고행을 일삼아 배우기를 구하되, 큰 가르침을 찾아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이르러 종사(宗師)를 친견하고, 경론(經論)을 깊이 탐구하여 잡화(雜花)의 묘의(妙義)를 통괄하고 경전의 참 뜻을 해통(該通)하였다. 어느 날 스님께서 학도(學徒)들에게 이르시되, “석자(釋子)는 다문(多聞)이요 안생(顔生)은 호학(好學)이라 하였는데, 옛날에는 그 말만 들었지만 이제 참으로 그런 사람을 보았으니, 어찌 청안(靑眼)과 적자(赤髭)를 비교해 같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대중(大中) 9년 복천사(福泉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는 부낭(浮囊)에 대한 뜻이 간절하였고,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자비의 정이 깊었다. ‘상교(像敎)의 종지(宗旨)는 이미 최선을 다하여 배우고 힘썼지만, 현기(玄機)의 비밀한 뜻을 어찌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랴’하고는 행장을 꾸려 지팡이를 짚고 하산하여 길을 찾아 곧바로 굴산(崛山)으로 나아갔다. 통효대사(通曉大師)를 친견하고 스스로 오체(五體)를 던져 예배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품은 뜻을 여쭈었다. 대사는 곧 입방(入榜)을 허락하고 드디어 그로 하여금 입실(入室)하게 하였다. 스님은 이로부터 수년 동안 대사를 모시되 근고(勤苦)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비록 지극한 도(道)는 어려움이 없다하지만, 마치 평지(平地)에 산을 만들 듯이 굳은 뜻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신적 피로는 항상 담박하여 마치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려는 수고로움을 더하였으며, 모든 난관을 겪되 아무리 굴욕적이고 비굴한 일이라도 능히 이겨내었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운수행각(雲水行脚)하면서 입당구법(入唐求法)할 생각이 간절하였다. 드디어 함통(咸通) 11년 당나라에 비조사(備朝使)로 가는 김긴영공(金緊公)을 만나 입당유학(入唐遊學)하려는 서소지심(西笑之心)을 자세히 말하였다. 김공(金公)이 갸륵하게 여기고 뜻이 통하여 같이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편하게 바다를 건너 서안(西岸)인 중국땅에 도달하였다. 그 곳에서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아니하고 상도(上都)에 이르렀다. 한 담당관이 있어 특별히 구법(求法)연유를 자세히 의종황제(懿宗皇帝)에게 알리니, 칙명(勅命)을 내려 좌우승록(左街僧錄)으로 하여금 보당사(寶堂寺) 공작왕원(孔雀王院)에 대사를 편안히 모시게 하였다. 기꺼운 바는 거처가 머무르기 좋은 환경이었고, 그 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부처님께서 강탄(降誕)하신 날에 칙명으로 궁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종황제는 “지극한 교화를 넓히고 또한 경건한 마음으로 불교인 현풍(玄風)을 드날리나이다”라 하였다. 황제가 대사에게 묻되 “머나 먼 바다를 건너오신 것은 무엇을 구하려 함입니까”하였다. 대사가 황제에게 대답하되, “빈도(貧道)는 상국(上國)의 풍속을 관찰하고 불도(佛道)를 중화(中華)에게 묻고자 하였는데, 오늘 다행히도 홍은(鴻恩)을 입어 성사(盛事)를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소승(小僧)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두루 영적(靈跡)을 샅샅이 참배하여 적수(赤水)의 구슬을 찾고, 귀국하여서는 우리나라를 비추는 청구(靑丘)의 법인(法印)을 짓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천자(天子)가 스님의 말을 듣고 기꺼워하며 후하게 총뢰(寵賚)를 더하고 그 말을 매우 훌륭하게 여긴 것은 마치 법수대사(法秀大師)가 진(晉)나라의 문제(文帝)를 만난 것과 담란법사(曇鸞法師)가 양무제(梁武帝)와 대좌한 것과 같았으니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나 이름난 대덕(大德)의 일은 더욱 같다 하겠다.

그 후 오대산(五臺山) 화엄사(花嚴寺)에 들러 문수대성전(文殊大聖前)에 기도하면서 감응(感應)을 구하게 되었다. 먼저 중대(中臺)에 올라가 홀연히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얀 신인(神人)을 만나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가호를 빌었다. 신인이 대사에게 이르되 “멀리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선재(善哉)라 불자(佛子)여! 이 곳에 오래 머물지 말고 속히 남방(南方)을 향하여 가서 오색지상(五色之霜)을 찾으면 반드시 담마(曇摩)의 비에 목욕하리라”고 일러 주거늘, 대사는 슬픔을 머금고 이별하여 점차로 남행(南行)하였다. 건부(乾符) 2년 성도(成都)에 이르러 이리저리 순례하다가, 정중정사(靜衆精舍)에 도달하여 무상대사(無相大師)의 영당(影堂)에 참배하게 되었으니 대사는 신라 사람이었다. 영정에 참배한 후 스님에 대한 아름다운 유적을 자세히 들으니, 한때 당제(唐帝)인 현종(玄宗)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모국은 같건만 오직 그 시대가 달라서 후대에 법을 구하러 와서 그의 자취를 찾게 됨이 한이 될 뿐이라 했다. 그 당시 석상경제화상(石霜慶諸和尙)이 여래의 집을 열고 가섭(迦葉)의 종(宗)을 연설하여 도수(道樹)의 그늘에 많은 선류(禪流)들이 운집하여 수도하고 있었다. 낭공대사(朗空大師)는 그 곳을 찾아가서 정성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입방(入榜)을 허락받아 그 곳에 머물게 되었으며, 방편(方便)의 문(門)에서 과연 마니(摩尼)의 보배를 얻었다. 그 후, 그 곳을 떠나 형악(衡岳)으로 가서 선지식(善知識)이 있는 선거(禪居)를 참배하였고, 다시 멀리 조계산으로 가서 6조대사의 탑에 예배하고 곁으로 동산홍인(東山弘忍)의 자취를 찾고 6조까지의 유적을 모두 순례하였다. 이어 사방으로 다니면서 가 볼만한 곳은 두루 참방하였다. “비록 이와 같이 공색(空色)을 관(觀)하여 국경을 초월하였다고는 하나, 어찌 편수(偏陲)인 고국를 잊을 수 있으리요”하고 중화(中和) 5년에 귀국하였다. 그 때 바로 굴령(堀嶺)으로 가서 다시 통효대사(通曉大師)를 배알(拜謁)하니 대사가 이르시되 “일찍 돌아와서 반갑구나. 어찌 다시 서로 만나 볼 줄이야 기약조차 하였겠는가”하였다. 후학들이 각각 그로부터 법을 이어 받으면서 이렇게 실천하고 있었으니, 대사의 비련(扉蓮)에 있으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얼마를 지난 후 홀연히 병발(甁鉢)을 휴대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을 떠나니, 때로는 석장(錫杖)을 오악(五嶽)의 처음에 날려 잠깐 천주사(天柱寺)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배를 삼하(三河)의 뒤에 띄워 행각하다가 수정사(水精寺)에 주(住)하기도 하였다. 문덕(文德) 2년 4월 중에 굴산대사(崛山大師)께서 병환에 있으므로 곧 고산(故山)으로 돌아가 정성껏 시봉하였으니, 열반할 때 이르러 부촉(付囑)하고 전심(傳心)을 받은 이는 오직 낭공대사 한 사람 뿐이었다. 처음 삭주(朔州) 건자난야(建子蘭若)에 주석(住錫)하고 겨우 초막을 수축하자마자 비로소 산문(山門)을 여니, 찾아드는 자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아침에 셋, 저녁엔 넷으로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

때는 시대가 액운(厄運)에 당하여 세상은 몽매한 때였으므로 재성(災星)이 길을 삼한(三韓)에 비추고 독로(毒露)는 항상 사군(四郡)에 퍼져 있음인즉, 하물며 암곡(岩谷)에도 숨어 피난할 곳이 없었다. 건녕초년(乾寧初年)에 왕성(王城)에 가서 머물면서 담복향을 내불당(內佛堂)에 분향하고, 광화말년(光化末年)에는 곧 야군(野郡)으로 돌아가서 풀을 깎아낸 유허(遺墟)에 전단향을 심기도 하였으나, 유감스러운 것은 마군(魔軍)의 시대를 만난 것이었다. 장차 불도(佛道)를 선양하고자 할 때, 마침 효공대왕(孝恭大王)이 보위(寶位)에 오르고 특히 선종을 흠모하여 받들었다. 당시 대사는 해동에 있어 독보적일 뿐만 아니라, 그 고고함이 천하에 우뚝 드러났으므로 특별히 승정(僧正)인 법현(法賢) 등을 보내어 봉필(鳳筆)을 전달하여 황거(皇居)인 왕궁(王宮)으로 초빙하였다. 대사가 문인들에게 이르시되 “처음 안선(安禪)함으로부터 하화중생(下化衆生)인 교화를 마칠 때까지 우리의 불교가 말대(末代)에 이르시기까지 유통됨은 국왕 대신들의 외호(外護)의 은혜이다”라 하고는 천우(天祐) 3년 9월 초에 홀연히 명주(溟州) 교외를 나와 경읍(京邑)에 도착하였다. 16일에 이르러 비전(祕殿)으로 인도하여 고고하게 법상(法床)에 올라 설법하니, 주상이 그 마음을 맑게 하고, 면류관과 조복(朝服)을 정돈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며 경건하게 찬앙(鑽仰)의 정을 펴거늘, 대사는 말씀과 안색이 종용(從容)하고 신의(紳儀) 또한 자약하였다. 도(道)를 높이 숭상함에는 복희씨와 헌원씨의 술(術)을 설하여 주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풍도(風道)를 일러 주었는데, 대사는 설법하거나 남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마치 거울이 물상(物像)을 비추어 주되 피로함을 잊은 것과 같이 하였고, 물음에 답할 때에는 종이 치기를 기다려 울리는 것과 같이 하였다. 친히 상전(上殿)하여 법을 받은 제자가 4인이니 행겸(行謙)·수안(邃安)·신종(信宗)·양규(讓規) 등이요, 양경(讓景)은 행(行)이 10철(十哲)을 뛰어넘고 이름은 삼선(三禪)을 덮었으며, 진리의 근본을 탐색하고 절대경의 심오한 이치를 논하였다. 성인(聖人)은 자주 진미(麈尾)인 불자(拂子) 휘두름을 보이니 이러한 설법으로 임금을 기껍게 하였다. 그러던 중 홀연히 다음 해 하말(夏末)에 잠깐 경기인 서울을 하직하고 바닷가로 행각하다가 김해부(金海府)에 이르니, 지부급제(知府及第)이며 동령군(同領軍)인 충자(忠子) 소율희공(蘇律熙公)이 옷깃을 여미고 덕풍(德風)을 흠모하던 중, 옷깃을 열고 도(道)를 사모하여 이름난 큰절에 주석하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창생을 복되게 하기를 희망한 것이었다. 십사(十師)가 함께 산중에 서지(棲遲)하니, 그윽이 자비의 교화(敎化)를 드리워 요망한 액운(厄運)의 연기는 모두 나라밖으로 쓸어버리고 감로(甘露)의 법수(法水)를 산중에 뿌리게 되었다. 

신덕대왕(神德大王)이 비도(丕圖)를 빛나게 통어(統御)하려 하여 왕위에 올라 은총으로 스님을 궁중으로 초빙하였다. 정명(貞明) 원년 봄에 대사는 약간의 선중(禪衆)을 거느리고 제향(帝鄕)에 이르니, 전날과 같이 명에 의하여 남산(南山) 실제사(實際寺)에 계시도록 하였다. 이 절은 본래 성상(聖上)이 아직 보위(寶位)에 오르기 전 황합(黃閤)에 있을 때 잠룡(潛龍)하던 곳인데, 이를 선방(禪房)으로 만들어 스님께 헌납하여 영원히 선우(禪宇)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대사를 행소(行所)로 맞이하여 거듭 스님의 자안(慈顔)을 배알하고, 이에 기다렸던 마음을 열어 다시 무위의 설법을 들었다. 하직하고 돌아가려 할 때에 특히 왕과 사자(師資)의 좋은 인연도 맺었다. 

이 때에 여제자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명요부인(明瑤夫人)이고 오도(鼇島)의 후손이며 구림(鳩林)의 관족(冠族)이었다. 스님을 우러름이 고산(高山)과 같았고, 불교를 존중하는 돈독한 불자(佛子)였다. 석남산사(石南山寺)를 스님께 드려서 영원히 주지하시라 청하니, 가을[秋] 7월에 대사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이고 비로소 이 절에 주석(住錫)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절은 멀리는 4악(四岳)을 연(連)하였고, 높기로는 남쪽의 바다를 눌렀으며, 시냇물과 석간수가 다투어 흐르는 것은 마치 쇠로 만든 수레를 계곡으로 끄는 것과 같았다. 암만(岩巒)이 다투어 빼어난 것은 자색(紫色) 구슬을 장식한 거개(車盖)가 하늘로 치솟은 것과 같았으니, 참으로 은사(隱士)를 초빙하여 유거(幽据)하게 할만한 곳이며, 또한 선(禪)을 닦기에 좋은 가경(佳境)이라 하겠다. 대사는 오래전부터 영산(靈山)을 찾아 다녔으나 정거(定居)할 곳을 구하지 못하다가, 이 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지막 열반할 곳으로 삼았다. 그 다음 해 봄 2월 초에 대사는 가벼운 병을 앓다가 12일 이른 아침에 대중을 모아 놓고 이르시되 “생명이란 마침내 끝이 있는 법. 나는 곧 세상을 떠나려 하니 도(道)를 잘 지키고 잃지 말 것이며, 너희들은 정진에 힘써 노력하고 게을리하지 말라”하시고 승상(繩床)에 가부좌를 맺고 단정히 앉아 엄연히 열반에 드시니 세수는 85세요, 승랍(僧臘)은 61이었다. 그 때에 구름과 안개가 마치 그믐처럼 캄캄하였고 산봉우리가 진동하였다. 산 아래 사람이 산정(山頂)을 올려다보니 오색(五色)의 광기(光氣)가 하늘로 향해 뻗쳐 있고, 그 가운데 한 물건(物件)이 하늘로 올라가는데 마치 금으로 된 기둥과 꼭 같았다. 이것이 어찌 지순(智順)스님이 열반할 때 방안에 향기가 가득하고 하늘로부터 화개(花盖)가 드리운 것과 법성(法成)스님이 입적(入寂)함에 염한 시신을 감마(紺馬)가 등에 업고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뿐이라 하겠는가! 이 때에 문인(門人)들은 마치 오정(五情)을 잘라내는 것과 같이 애통(哀痛)해 하였으니 천속(天屬)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7일에 이르러 공경히 색신(色身)을 모시고 서봉(西峰)의 기슭에 임시로 장례를 지냈다. 성고대왕(聖考大王)이 홀연히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진실로 선금(仙襟)을 아파하면서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를 감호(監護)하는 한편, 조의(吊儀)를 표하게 하였다. 3년 11월 중순에 이르러 동만(東巒)의 정상(頂上)으로 이장하였으니, 절과의 거리는 약 300보였다. 이장하려고 열어 보니 전신(全身)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어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신색(神色)도 생전(生前)과 같았다. 문하생(門下生)들이 거듭 자안(慈顔)을 보고, 감모(感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하면서 석호(石戶)를 마련하여 봉폐(封閉)하였다. 

대사께서는 영정(靈精)을 하악(河嶽)에서 받아 태어났고, 기질은 성신(星辰)으로부터 품받았다. 신분(身分)은 누더기 걸치는 황납(黃衲)에 속하나, 황상(黃裳)의 길상(吉相)에 응하였다. 이런 연유로 일찍이 선경(禪境)에 깃들었고 오랫동안 수도하여 객진번뇌(客塵煩惱)를 모두 털어 버렸으며, 두 임금을 양조(兩朝)에 걸쳐 보비(補裨)하고 군생을 삼계고해(三界苦海)에서 구제하였다. 그리하여 나라가 태평들하고 마적(魔賊)을 모두 귀항(歸降)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대각의 진신(眞身)이며 관음의 후신(後身)인 줄 알겠도다. 현관(玄關)을 열어 지묘(至妙)한 이치를 부양하고, 자실(慈室)을 열어 미혹한 중생을 인도하다가 열반을 보이시니, 이는 부처님께서 학수(鶴樹)에서 진적(眞寂)으로 돌아가신 자취를 본받은 것이요, 화신(化身)이 살아 있는 것 같으니, 가섭존자가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살아있을 때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시종(始終)에 걸쳐 도를 넓히시니, 가히 정혜(定慧) 무방(無方)하며 신통이 자재(自在)한 분이라고 할만 하도다. 제자 신종선사(信宗禪師)와 주해선사(周解禪師), 임엄선사(林儼禪師) 등 500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함께 일심으로 다져졌으니, 모두 상족(上足)의 위치에 있어서 항상 부지런히 수호하여 길이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거해(巨海)에 먼지가 날듯, 강한 바람에 번갯불이 꺼지듯, 스님의 고매한 위적(偉跡)이 점점 연멸할까 염려하여, 여러 차례 위궐(魏闕)에 주달하여 비명 세우기를 청하였다.

지금 임금이 홍기(洪基)에 올라 공손히 보록(寶籙)을 계승하고, 아울러 선화(禪化)를 흠숭(欽崇)하시기를 전조(前朝)와 다름없이 하였다. 그리하여 시호를 낭공대사(朗空大師)라 하고, 탑명(塔名)을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추증하였다. 이에 미신(微臣)인 저에게 명하여 “경은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제구(虀臼)인 명문(名文)을 지으라”하였다. 인연(仁渷)은 고사(固辭)하였지만 끝내 면치 못하여 명을 따라 나름대로 천박한 비사(菲詞)를 나열하여 스님의 빛나는 유덕(遺德)을 찬양하려 하니, 마치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려는 것과 같아서 바닷물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으며, 또한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아서 창천(蒼天)의 광활함을 측량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일찍부터 스님으로부터 자비하신 가르침을 입었으며, 종맹(宗盟)으로써 임금의 보살핌을 입은 것에 보답하는 뜻으로 붓을 잡아 정성을 다하였으니, 지은 글에 크게 부끄러움은 없다. 억지로 현도(玄道)라 이름하여 이로써 법은(法恩)을 갚고자 한다.

그 찬사(讚詞)에 이르되, 

지극한 도리는 본래 무위법(無爲法)이니

마치 대지가 무념무작(無念無作)한 것과 같네.

차별한 만법이 마침내 동귀(同歸)하니

천문무행(千門無行) 그 근원은 일치하도다.

깊고도 오묘한 정각(正覺)의 높은 경지

방편(方便)을 베풀어서 군생(群生)을 제도하네.

성인(聖人)과 범부(凡夫)가 다르다곤 말하지만

진리를 깨고 보면 조금도 다름없네.

석상(石霜)을 이어받은 위대한 선백(禪伯)이여!

동방(東方)에 빛나는 해동(海東)에 태어났도다.

지혜의 총명함은 일월(日月)보다 더 하고

풍도(風度)의 높고 넓음은 허공(虛空)과 같도다.

이름은 덕(德)으로 인하여 나타났지만

지혜는 자비와 더불어 융통했으니, 

당(唐)나라에 들어가 법인(法印)을 전해 왔고

본국(本國)에 돌아와선 동몽(童蒙)을 개도했네.

마음은 맑고 맑아 수중(水中)의 달과 같고

은은하고 고요함은 연하(煙霞)와 같으며,

임금은 숙연하게 도덕(道德)을 흠모하여

친서를 보내 왕궁으로 초빙하였네. 

진성(眞聖)과 효공(孝恭)의 양조(兩朝)를 부찬(扶贊)하였고 

불교(佛敎)의 교리를 곳곳에 드날려서 

지혜의 등을 밝혀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무명(無明)의 구름 사라지니 밝은 달 비추네.

도(道)와 덕(德)이 높으신 철인(哲人)은 떠나가고

승속(僧俗)의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하네.

문도(門徒)들은 혜명(慧命)의 책무 더욱 느끼고

임금님의 베푸신 은혜 깊고도 깊네.

봉정(峰頂)에는 사리탑(舍利塔)이 우뚝이 솟았고

큰스님의 비석은 시내 곁에 서 있네.

개자겁(芥子劫)의 긴 세월(歲月) 비록 다하더라도 

오래도록 이 비석 선림(禪林)을 비출지이다.

신라국(新羅國) 석남산(石南山) 고국사비명(故國師碑銘) 후기(後記)

문하법손(門下法孫) 석순백(釋純白) 지음.

공손히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 대사께서 출태(出胎)로부터 몰치(沒齒)에 이르기까지 생연(生緣)과 권속들, 그리고 모든 촉사(觸事)에 대한 인연은 문생(門生)인 김장로(金長老) 윤정(允正)이 지은 기록에 갖추어 기록되어 있으며, 문인(門人) 최대상(崔大相)인 인연(仁渷)이 지은 비문에 서술하였으니, 지금 순백(純白)이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직 대사께서 당신라국(唐新羅國) 경명왕(景明王) 때인 천우년중(天祐年中)에 화연(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드셨을 때, 명왕(明王)이 시호와 탑명(塔名)을 추증하고 이어 최인연(崔仁渷) 시랑(侍郞)에게 칙명을 내려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인심은 교활하여 뜻있는 일을 하기에 더욱 어려운 시대였다.

그 후 해가 바뀌고 여러 달이 지났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후고려(後高麗)가 사군(四郡)을 평정하고 삼한(三韓)이 정정(鼎正)됨에 이르러서 현덕(顯德) 원년(元年) 7월 15일에 태자산(太子山)에 이 큰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국사(國師)의 문하(門下)에 제일 신족(神足)은 국주(國主)인 임금이고, 사찰(寺刹)의 승두(僧頭)는 건성원(乾聖院)의 화상이니 휘는 양경(讓景)이요, 속성은 김씨이며, 자는 거국(擧國)이다. 낭공대사(朗空大師)에게 경우에 따라 몸이 되고 마음이 되어 보필하였으며, 국왕(國王)의 편에 스스로 귀가 되고 눈이 되어 보국(補國)하였다. 장차 방진(芳塵)이 바람에 날아가고, 시간이 오래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아름다운 위적(偉蹟)도 구름처럼 잊혀져 빛나는 기록마저 연멸되리니, 취염(翠琰)도 세우지 않으면 대사의 법은(法恩)은 작보(雀報)만이 스스로 세워진 비가 되리라. 

화상(和尙)의 왕부(王父)는 애(藹)이니, 원성왕(元聖王)의 표래손(表來孫)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장인이다. 청렴결백하여 모든 사람들의 입에 자자하였고, 충효는 높아 낮은 모든 사람들의 입으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칭송되었다. 안으로는 집사시랑(執事侍郞)을 지냈고, 밖으로는 패강(浿江) 도호(都護)를 역임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순례(詢禮)니, 재주는 육예(六藝)를 겸하였고, 학문은 오경(五經)을 관통하였다. 월하(月下)와 풍전(風前)에서 읊으면 연정체물(緣情體物)의 시구(詩句)에 속하고, 봄꽃과 달밤에는 무현(撫絃)과 운죽(韻竹)의 소리를 나타내는 풍류(風流)가 있었다. 내직(內職)으로는 집사함향(執事含香)에 이르고, 외임(外任)으로는 삭주장사(朔州長史)를 역임하였다. 화상의 젊은 시절부터 늙음에 이르기까지의 행동거지와 언모(言謨)와 행적(行蹤)과 풍격(風格) 등은 모두 별록(別錄)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국사(國師)의 비문과 어록에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 기록되지 아니한 것들만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용담식조(龍潭式照), 건성양경(乾聖讓景), 연▨혜희(鷰▨惠希), 유금윤정(宥襟允正), 청룡선관(淸龍善觀), 영장현보(靈長玄甫), 석남형한(石南逈閑), 숭산가언(嵩山可言), 태자본정(太子本定)이 있으니, 앞에 열거한 아홉 분의 스님은 국사가 생존시에는 날개가 알 속에 있어서 아직 청운(靑雲)의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국사께서 열반하신 후에는 각자 나름대로의 각족(角足)이 발달하고 완전한 몸체가 이루어져 비로소 자유롭게 푸른 바다 가운데로 유희(遊戲)하게 되었다. 스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법석(法席)의 대중이 우모(牛毛)처럼 많았으나, 입멸(入滅)하신 후에는 선좌(禪座)가 겨우 종유(鍾乳)의 수에 불과(不過)하였다. 흔히 사람들이 평하기를 구유(九乳)는 종과 같아서 그 젖으로 구방(九方)의 불자(佛子)를 기르되 일면(一面)은 거울과 같다하였으니, 마치 일국(一國)의 군신(君臣)과 같은 격이라 하였다. 이른바 날개와 같은 대중이 많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것 같다. 윤정장로(允正長老)는 건성양경(乾聖讓景)과 동태(同胎)의 동생이다. 계(戒)를 고상하게 가져 이름이 뛰어났던 것과 생몰연대(生歿年代)와 언행(言行) 등은 모두 그의 문인이 따로 기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태양이 침실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고, 만삭이 되어 해산하려는 달에는 달이 밀굴(密窟)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니, 과연 꿈대로 건성양경(乾聖讓景)과 유금윤정(宥襟允正)을 분만하였다. 어찌 석담체(釋曇諦)의 어머니가 이물(二物)의 상징을 꿈꾸고, 혜▨(慧▨)의 아양(阿孃)이 이과(二果)의 상서를 얻은 것 뿐 이겠는가. 최인연(崔仁渷)은 진한(辰韓)의 무족(茂族) 사람이다. 이른바 일대(一代)의 삼최(三崔)가 모두 당나라에 유학하여 금방(金榜)으로 급제하고 귀국하였으니 최치원(崔致遠), 최인연(崔仁渷), 최승우(崔承祐) 등인데, 인연(仁渷)은 그 중간에 속하는 사람이다. 학문은 해악(海岳)을 두루 덮었고, 열람한 책은 오거(五車)에 이거(二車)를 더하였으며, 재주는 풍운(風雲)을 모두 맡아 칠보시(七步詩)의 재능에서 삼보(三步)를 제하였으니, 실로 군자국(君子國) 군자(君子)이며 또한 대인향(大人鄕)의 대인(大人)이라 하겠다.

이는 월계수(月桂樹)의 가지를 중화(中華)에서 꺾었고, 향풍(香風)은 상국(上國)에서 드날렸으며, 다라국(多羅國)에서 불교를 배워 동향(東鄕)인 우리나라를 빛나게 하였다. 대사의 무거운 은혜를 입었기에 스님에 대한 홍비(鴻碑)의 기록을 순백(純白)이 찬술하였으나, 마치 잣대로 하늘의 높이를 재려함과 같으니 어찌 그 가깝고 멀음을 알 수 있으며, 달팽이 껍질로 바닷물을 짐작하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그 많고 적음을 헤아릴 수 있으리오. 그렇다면 말을 해도 부당하고, 또한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옳지 않으니, 후래(後來)의 군자(君子)들은 취하거나 버리는 것을 각자 자의(自意)에 맡길 뿐이다. 

현덕원년(顯德元年) 세재갑인(歲在甲寅) 7월(七月) 15일(十五日) 세우다. 

 

句當事僧:逈虛長老

刻字僧:嵩太尙座 秀規尙座 淸直師 惠超師 

院主僧:高賢長老

典座僧:淸良

維那僧:秀宗

史 僧:日言

直歲僧:規言

【追記側面】

내가 어릴 때 김생(金生)의 필적(筆蹟)을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安平大君 1418~1455)]에서 얻어보니, 그 필법(筆法)이 마치 용이 날뛰고 호랑이가 누워있는 것과 같아서, 그 기세(氣勢)를 보고 크게 좋아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전함이 많지 않음을 한탄하여 오던 중 근래(近來)에 영주(榮州)의 인읍(隣邑)인 봉화현(奉化縣)에 김생(金生) 글씨의 비석(碑石)이 홀로 고사(古寺)의 유허(遺墟)에 남아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희세(希世)의 보배가 초망지간(草莽之間)에 매몰되어 있으나 수호하는 사람이 없어 야우((野牛)의 뿔에 부딪쳐 상하거나, 목동들의 불장난 등이 모두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군인(郡人)인 전참봉(前叅奉) 권현손(權賢孫)과 공모(共謀)하여 자민루(字民樓) 아래에 이전하여 안치하고 사방(四方)으로 난함(欄檻)을 둘러 출입을 통제하였다. 탁본(托本)하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출입을 금하였으니, 함부로 만져 손상이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김생(金生)의 필적(筆蹟)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감상하러 찾아 들었다. 슬프다. 천백년(千百年) 동안 폐허에 버려져 있던 비석이 하루아침에 큰 집으로 옮겨져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물건의 나타나고 숨는 것도 또한 운수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비록 재주가 미천하고 창려[昌藜(韓愈의 封號)]와 같은 박학(博學)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 비석을 만나 상완(賞翫)하고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진실로 기산(岐山)의 석고[石鼓 : 주(周)의 선왕(宣王) 2대 사주(史籒)의 송(頌)을 대전(大篆)으로 새긴 10개의 석고(石鼓)이니, 중국에서 제일로 꼽는 보물로서 현재 북경(北京)의 구국자감(舊國子監) 대성문(大城門) 좌우에 있음)]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정덕(正德) 4년(1509) 가을[秋] 8월 군수(郡守)인 낙서(洛西) 이항(李沆)이 짓고 박눌(朴訥)이 쓰다.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新羅國故 兩朝國師 敎諡朗空大師白月棲雲之塔碑銘幷序」

      門人翰林學士守兵部侍郎知瑞書院事賜紫金魚袋 (臣)崔仁滾奉敎撰」

      金生書 釋端目集

聞夫眞境希夷玄津杳渺澄如滄海邈若太虛智舟何以達其涯慧駕莫能尋其際況復去聖逾遠滯凡旣深靡制心猿難調意馬由是侚虛弃實者倶懷逐塊之情執有迷空者盡起趨炎之想若非哲人出世開士乘」

時高演眞宗廣宣善誘何以爰重玄之禮得歸衆妙之門認髻珠密傳心印達斯道者豈異人乎大師是也」

大師法諱行寂俗姓崔氏其先周朝之尙父遐苗齊國之丁公遠裔其後使乎兎郡留寓雞林今爲京萬河南人也祖諱全避世辭榮幽居養志父諱佩常年登九歲學冠三冬長牽投筆之心仍效止戈之藝所以繫名」

軍旅充職戎行母薛氏夢見僧謂曰宿因所追願爲阿孃之子覺後感其靈瑞備啓所天自屛膻腴勤爲胎敎以大和六年十二月三十日誕生 大師生標奇骨有異凡流遊戱之時須爲佛事每聚沙而造塔常摘葉」

以爲香爰自靑襟尋師絳帳請業則都忘寢食臨文則惣括宗源甞以深信金言志遺塵俗謂父曰所願出家修道以報罔極之恩其父知有宿根合符前夢不阻其志愛而許之遂迺削染披緇苦求遊學欲尋學海歷」

選名山至於伽耶海印寺便謁宗師精探經論統雜花之妙義該貝葉之眞文師謂學徒曰釋子多聞顔生好學昔聞其語今見其人豈與靑眼赤髭同年而語哉大中九年於福泉寺官壇受其戒旣而浮囊志切繫」

草情深像敎之宗已勞力學玄機之旨盍以心求所以杖策挈瓶下山尋路徑詣崛山謁通曉大師自投五軆虔啓衷懷大師便許昇堂遂令入室從此服膺數載勤苦多方雖至道▨▨目罄成山之志而常齋淡簿」

神疲增煮海之勞則知歷試諸難多能鄙事每於坐臥只念遊方遂於咸通十一年投入俻朝使金公緊榮西笑之心備陳所志金公情深傾盖許以同舟無何利涉大川達于西岸此際不遠千里至於上都尋蒙有司特」

事由奏聞 天聽降敕宜令左街寶堂寺孔雀王院安置大師所喜神居駐足勝境栖心未幾降誕之辰來敕徵入內 懿宗皇帝遽弘至化虔仰玄風問大師曰遠涉滄溟有何求事大師對 勑曰貧道幸獲」

觀風 上國問道 中華今日叨 沐鴻恩得窺盛事所求遍遊靈跡追尋赤水之珠還耀吾鄕更作靑丘之印 天子厚加寵賚甚善其言猶如法秀之逢晉文曇鸞之對梁武古今雖異名德尤同以後至五臺山投」

花嚴寺求感於文殊大聖先上中臺忽遇神人鬢眉皓爾叩頭作禮膜拜祈恩謂大師曰不易遠來善哉佛子莫淹此地速向南方認其五色之霜必沐曇摩之雨大師含悲頂別漸次南行乾符二年至成都俯巡謁到」

靜衆精舍禮無相大師影堂大師新羅人也因謁寫眞聞遺美爲唐帝導師 玄宗之師同鄕唯恨異其時後代所求追其跡企聞石霜慶諸和尙啓如來之室演迦葉之宗道樹之陰禪流所聚大師殷勤禮足曲盡」

虔誠仍栖方便之門果得摩尼之寶俄而追遊衡岳叅知識之禪居遠至漕溪禮祖師之寶塔傍東山之遐秀採六葉之遺芳四遠叅尋無方不到雖觀空色豈忘偏陲以中和五年來歸 故國時也至於崛嶺重謁大」

師大師云且喜早歸豈期相見後學各得其賜念玆在玆所以再託扉蓮不離左右中間忽携瓶鉢重訪水雲或錫飛於五嶽之初暫栖天柱或盃渡於三河之後方住水精至文德二年四月中崛山大師寢疾便往故」

山精勤侍疾至於歸化付囑傳心者唯在大師一人而已初憇錫於翔州之建子若纔修茅舍始啓山門來者如雲朝三暮四頃歲時當厄運世屬此蒙災星長照於三韓毒露常鋪於四郡况於巖谷無計藏乹寧初」

至止王城薫薝蔔於焚香之寺光化末旋歸野郡植旃檀於薙草之墟所恨正値魔軍將宣佛道 孝恭大王驟登寶位欽重禪宗以大師獨步海東孤標天下特遣僧正法賢等聊飛 鳳筆徵赴 皇居大師謂門」

人曰自欲安禪終須助化吾道之流於末代外護之恩也乃以天祐三年秋九月初忽出溟郊方歸 京邑至十六日引登 秘殿孤坐禪床主上預淨宸襟整其冕服待以國師之禮虔申鑚仰之情大師辭色從容」

神儀自若尊道說羲軒之術治邦談 堯舜之風鏡忘疲洪鍾待扣有親從上 殿者四人曰行謙邃安信宗讓規讓景行超十哲名盖三禪探玄鄕之秘宗論絶境之幽致所聖人見之尙頻迴塵尾甚悅龍顔忽於明年夏」

末乍別 京畿略遊海嶠至金海府 蘇公忠子知府及第律熈領軍莫不歛袵欽風開襟慕道請居名寺冀福蒼生十六師四可以栖遲暗垂慈化掃妖煙於塞外灑甘露於山中  神德大王光統丕圖寵徵赴 闕」

至貞明元年春大師遽携禪衆來至 帝鄕依前命南山實際寺安之此寺則先是 聖上以黄閤龍禪扃附鳳尋付大師永爲禪宇此時奉迎 行所重謁慈顔爰開有待之心再聽無爲之說辭還之際特結良因」

爰有女弟子明瑤夫人鼇島宗枝鳩林冠族仰止高山尊崇佛理以石南山寺請爲収領永以住持秋七月大師以甚愜雅懷始謀栖止此寺也遠連西岳高壓南溟溪㵎爭流酷似金輿之谷巖巒鬬崚疑如紫盖之峰」

誠招隱之幽据亦栖禪之佳境者也大師遍探靈巘未有定居初至此山以爲終焉之所至明年春二月初大師覺其不悆稱染微疴至十二日詰旦告衆曰生也有涯吾將行矣守而勿失汝等勉旃趺坐繩床儼然就」

滅報八十五僧臘六十一于時雲霧晦冥山巒震動有山下人望山頂者五色光氣衝於空中中有一物上天宛然金柱豈止智順則天垂花盖法成則空歛靈棺而已哉於是門人等傷割五情若忘天屬至十七日」

敬奉色身假隷于西峯之麓  聖考大王忽聆遷化良惻仙襟特遣中使監護葬儀仍令吊祭至三年十一月中改葬於東巒之頂去寺三百來步全身不散神色如常門下等重覩慈顔不勝感慕仍施石戶封閉」

大師資靈河岳禀氣星辰居縷褐之英應黃裳之吉由是早栖禪境久拂客塵裨二主於兩朝濟群生於三界邦家安太魔賊歸降則知大覺眞身觀音後體啓玄關而敷揚至理開慈室而汲引玄流生命示亡效鶴樹」

歸眞之跡化身如在追雞峯住寂之心存歿化人始終弘道可謂定慧無方神通自在者焉 弟子信宗禪師周解禪師林偘禪師等五百來人共保一心皆居上足常勤守護永切追攀每念巨海塵飛高風電絶累趍」

魏闕請樹豊碑今上克纉洪基恭承寶籙欽崇禪化不異前朝贈諡曰朗空大師塔名白月栖雲之塔爰命微臣宜修韲臼仁滾固辭不免唯命是從輙課菲詞式揚 餘烈譬如提壺酌海莫知溟渤之深執管闚天難測」

穹蒼之闊然而早蒙慈誨眷以宗盟唯以援筆有情著文無愧强名玄道將報法恩其詞曰」

至道無爲 猶如大地 萬法同歸 千門一致 粵惟正覺 誘彼群類 聖凡有殊 開悟無異 懿歟禪伯 生我海東 明同日月 量等虛空 名由德顯 智與慈融 去傳法要 來化童蒙 水月油澄」

心 煙霞匿曜 忽飛美譽 頻降佳召 扶賛兩朝 闡揚玄敎 甁破燈明 雲開月昭 哲人去世 緇素傷心 門徒願切 國生恩深 塔封巒頂 碑倚溪潯芥城雖盡 永曜禪林」

  (陰記)

新羅國石南山故國師碑銘後記」

門下法孫釋純白述」

恭維   我國大師始自出胎終於沒齒生緣眷屬觸事因緣卽門生金長老允正所修錄之門人崔大相仁滾所撰」

碑述之今白之所記者 ▨以大師於唐新羅國景明王之天祐年中化緣畢已 明王諡號銘塔仍勑崔仁滾侍郎使」

撰碑文然以世雜人猾難爲盛事是以年新月古未立碑文至後高麗國几平四郡鼎正三韓以顯德元年七月十五日樹此」

豐碑於太子山者良有良緣者乎爰有國師之門神足國主寺之僧頭乾聖院和尙者法諱讓景俗姓金氏字曰舉國爲師」

而或體或心爲王而乍耳乍目將恐芳塵風掃美跡雲消黃絹將爛翠琰弗植  師恩雀報自立龜碑和尙王父藹」

元聖王之表來孫憲康王之外庶舅淸廉聒於街路忠孝譽酣於尊卑內知執事侍郞外任浿江都護父詢禮才兼六藝」

學慣五經月下風前屬緣情體物之句春花夜月呈撫絃韻竹之聲內至執事含香外赴朔州長史和尙始自華色終於叟」

身動止言謨行蹤風格可備別錄此略言焉且   國師碑之與錄可記而未記者曰龍潭式照乾聖讓景鷰▨惠希宥」

襟允正淸龍善觀靈長玄甫石南逈閑嵩山可言太子本定右九師者    國師存日羽翼在卵未翥靑雲之際」

國師歿後角足成體始遊碧海之中  師之在時法席牛毛之數師之入滅禪座財鍾乳之多人謂之評曰九乳若鍾養」

九方之佛子一面如鏡正一國之君臣古所謂翼衆詵詵玆焉在焉其允正長老者乾聖同胎之弟也戒高持者名出有人存」

歿言行門人別錄其母氏夢任孟之日日入於寢室娠季之月月入於密窟果誕乾聖與宥襟也豈趐曇諦阿母夢二物之」

徵慧住阿孃獲二果之瑞而已哉其仁滾者辰韓茂族人也人所謂一代三崔金牓題迴曰崔致遠曰崔仁滾曰崔承祐猶」

中中人也學圍海岳加二車於五車才風雲除三步於七步實君子國之君子亦大人鄕之大人是或折桂中花扇香風」

於上國得多羅域曜景色於東鄕承 大師重席之恩撰 大師鴻碑之記白也執尺占天那終近遠傾蠡酌海豈」

度小多然則言而不當默猶不可後來君子取之捨之而已」

 顯德元年歲在甲寅七月十五日立」

      句當事僧 逈虛長老」

      刻字僧 嵩太尙座 秀規尙座 淸直師 惠超師」

      院主僧 嵩賢長老 典座僧 淸良 維那僧」

      秀宗史僧 日言 直歲僧 規言」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