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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의 통일신라시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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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로란 사람과 車馬가 왕래하는 길이다. 생산의 지역적 전문화가 이루어져 잉여 생산이 증대되면 물자를 교역하게 된다. 물자를 교역하기 위해서는 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통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통로 개척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거진 수품을 헤치고 일정한 넓이로 먼 길을 평탄하게 다듬어야 하며,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각종 맹수의 위협으로부터 인명을 보호해야 하고, 그러한 교통로의 개척이나 교역체계를 반대하는 주변의 정치세력들의 무력행사도 막아내야 했다.

교역로는 물자의 교역만을 위해서 개척되는 것은 아니다. 이웃 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교통로가 개척되기도 하며, 정복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통로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교통로 역시 물자교역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소국(小國)을 정복하고 그 정복상태를 유지하며, 나아가 지방행정단위로 편제하여 각종 조세와 공물을 수취하여 운반해 오기 위해 개척되었다.

鐵 생산을 기반으로 국력을 증대시킨 신라는 주변 소국들을 정복해 나아갔다. 이웃 소국 정복은 해당 소국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는 수단이 될 뿐 아니라 그 다음 소국을 침략하기 위한 교통로 개척의 발판이 되었다. 이에 초기 신라가 주변의 소국을 정복해 나아간 방향에 따라 당시의 교통로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교통로 개척은 국가 권력의 지방 침투를 용이하게 하고 지방세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교통로 개척은 중앙집권국가의 출현을 촉진하였으며,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신라에 복속되었다가 다시 반기를 들었던 실직국·압독국·사벌국 등이 곧바로 신라군에 의해 진압되고 그 지배층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진 것도 신라군이 개척한 교통로를 따라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척된 교통로는 국왕의 지방 순행, 조세 공물의 운반 교역 물자의 수송, 병력 및 역역에 동원된 장정이 이동하는 때에 이용되었다. 물자와 인원의 유통이 활발하게 되자 소지왕 9년(487년)에 사방에 우역(郵驛)을 두고 관도(官道)를 수리하였다. 개척된 교통로는 신라군의 교통로이기도 하였지만 적군의 침투로도 되는 만큼 주요 전략적 지점에는 성곽시설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신라가 축조한 성곽은 100여개에 달한다.

신라는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말갈과 고구려를 막기 위해 성곽을 쌓았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곽으로는 울주, 양산, 부산 등에 성곽을 쌓았다. 강원도 지역에는 춘천의 삼악산성, 횡성의 덕고산성, 철원의 토성리토성, 양구의 비봉산성 등을 들 수 있다. 신라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함경도 지역에도 성곽을 축조하였다. 함경남도 홍원에 성령산성, 함주의 오로리산성 등이 그것이다.

성곽은 주요 교통로에서 가까우며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험준한 지형을 택하여 최소한의 공력으로 수성과 공성에 유리하도록 축성하였다. 경사도가 심한 낭떠러지가 있는 곳에는 처음부터 축성하지 않았으며, 큰 바위가 있는 곳은 바위 옆과 위로 성돌을 쌓아 그대로 성벽이 되게 하여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신라의 성곽 대부분은 전투용 방어시설이었다.

신라는 6세기 초부터 왕권을 강화하여 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에서 중앙과 지방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것은 영역이 확장되고 고구려, 백제와의 대결이 더욱 첨예하게 된 조건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7세기 중엽까지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집권체제는 크게 강화되지는 못하였다. 6부에 거주하는 성골, 진골 등 최고위급 귀족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화백회의와 그 수석인 상대등의 권한이 큰 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김춘추, 김유신을 비롯한 새 귀족 세력들은 오랜 문벌귀족세력의 정치분야에서의 간섭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한층 더 강화할 것을 지향하였으며, 이것은 고구려 백제를 반대한 전쟁과 이후 나당전쟁 과정에서 실현되었다.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중앙관제의 변동은 대체로 신문왕 10년(690년)에 일단락되었다.

중앙관제의 개편과 정비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집사부의 기능이 강화된 반면에 상대등의 권한은 일정한 제한을 받게 된 것이었다. 종전에 신라에서는 중요한 정책적 문제들을 화백회의에서 토의하고 결정하였다. 따라서 상대등의 발언권이 컸다. 654년 김춘추가 왕이 된 것은 왕권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할 것을 지향한 신귀족세력이 기존 귀족세력을 물리친 결과였다. 660년 김유신이 상대등 자리를 차지한 것을 계기로 화백회의 기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그것은 상대등이 왕권에 종속되는 존재이며, 하나의 자문기관으로 변화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화백회의와 상대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된 대신에 집사부와 그 장관인 시중의 지위가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진덕왕 5년(651년)에 본래 있던 품주(稟主)를 개편하여 새로 설치된 집사부는 여러 중앙 관청들을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장관인 중시는 상대등이나 병부령 보다 낮았으나, 실제적인 권한을 가졌다. 집사부는 국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집행하는 행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그 장관인 중시는 국가행정상 중요책임을 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시는 국가에 큰 흉년이 든다든가 지진이나 국가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날 경우에는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것은 중시가 국왕의 책임을 대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7세기 중엽이후 신라의 집권자들은 집사부를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중앙의 기관을 확장하였다. 위화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관리들의 임명을 담당하였다. 국왕이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종전에 화백회의에서 관료를 추천받던 것과는 달라졌다는 것이며, 국왕의 권한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법기관으로서의 이방부, 감찰기관으로서의 사정부 등을 더 설치하였다. 중앙 관청 가운데 권한이 확대된 것은 창부이다. 창부는 국가의 조세수입과 재정을 맡았다. 7세기 중엽이후 영토의 확장으로 인하여 관원의 숫자가 원래 8명을 두었던 것이 7세기 후반에는 18명이 되었다가 8세기 후반에는 3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행정기관의 정비와 확장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7세기 중엽이후 새로 확장된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는데 국왕과 김유신을 비롯한 집권 세력들은 왕권을 강화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기존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지방세력을 우대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 지역이 신라의 새 영토로 편입된 조건에서 지방통치기구가 정비되고 강화되었다. 문무왕 13년(673년) 지방관리들의 감찰을 위하여 외사정을 새로 세웠다. 외사정은 왕권이 지방에 침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외사정은 매 주에 2명, 매 군에 1명씩 두고, 지방관리의 동향과 직권남용, 탐학 등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1) 675년에는 중앙관청 뿐 아니라 주나 군에 이르기까지 官印을 구리로 만들어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국왕은 자기의 심복을 시켜 지방을 돌아다니게 하면서 지방 귀족이나 토호들의 동향을 살피게 하였다. 

『삼국유사』권 2 기이 문무왕 법민 조 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문무)왕이 하루는 서제(庶弟) 거득공(車得公)을 불러 이르기를, “네가 재상(冢宰)이 되어 백관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四海)를 태평하게 하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만약 소신으로 재상을 삼고자 하신다면, 원컨대 신은 국내를 가만히 다니면서 민간 부역의 괴롭고 편안함과 조세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의 청렴하고 탐오함을 살펴본 뒤에 취임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쫓았다. 공은 치의(緇衣)를 입고 비파를 든 거사(居士)의 차림으로 서울(京師)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 우수주(牛首州), 북원경(北原京)을 거쳐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러 마을〔理閈〕을 순행하니, 주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이인(異人)으로 보고 자기 집으로 받아들여 정성껏 대접하였다. 밤이 되자 안길이 처첩 세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 밤에 거사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은 종신토록 해로 하겠다”고 하였다. 두 처가 말하기를,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딴 사람과 함께 잔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그 중의 한 처가 말하기를, “공이 만약 종신토록 같이 살기를 허락한다면 명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대로 쫓았다. 이튿날 아침 거사가 작별하고 떠나려 할 때 말하기를, “나는 서울 사람으로 내 집은 황룡(黃龍)과 황성(皇聖)의 두 절 사이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 속에서는 단오를 거의(車衣)라고 한다. 하니, 주인이 만약 서울에 오면 내 집을 찾아주면 좋겠소”라고 하고,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문무왕은 자신의 동생인 거득공(車得公)을 비밀리에 지방에 보내어 백성들의 부역과 납세 부담이 얼마나 되는가, 관리들이 청렴한가 부패했는가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거득공은 승려로 가장하고 지금의 강원도인 하서주, 우수주로 갔으며, 북원경을 거쳐 무진주(전남 나주)까지 갔다가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당시 지방통치를 집권체제 아래 두려는 조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중엽 이후 지방통치체제 정비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는 9주 5소경과 군현제도를 재편성하고 정착시킨 것이다. 신라는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小京을 설치하고 강화하였다. 소경은 지방에 중앙의 권력을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제일 먼저 설치된 것이 678녀에 북원소경(강원 원주)였으며, 680년에 금관소경(경남 김해), 685년에 서원소경(충북 청주), 남원소경(전북 남원)을 각각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그전에 이미 있었던 국원소경(충북 충주, 557년에 설치)과 함께 5소경 체제가 완성되었다. 소경에는 사신(仕臣;仕大等)을 장관으로 두고, 차관을 사대사(仕大舍)로 각각 1명씩 두었으며, 모두 중앙에서 파견하였다.

신라 지방통치의 중심거점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은 주였다. 7세기 중엽 이후 영토가 급격히 확대되어 그 통치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새로 여러 개의 주·군·현을 두거나 정비하여 9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9주 체제를 완성하였다. 즉 본래의 신라 지역에는 삽량주(歃良州, 良州:경상남도 양산), 사벌주(沙伐州), 상주(尙州:경상북도 상주), 청주(菁州), 강주(康州:경상남도 진주)를, 이전 백제지역에는 무진주(武珍州, 武州:전라남도 광주), 완산주(完山州, 전주:전라북도 전주), 웅천주(熊川州, 熊州:충청남도 공주)를 그리고 이전 고구려 지역에는 한산주(漢山州, 漢州:경기도 광주), 수약주(首若州, 朔州:강원도 춘천), 하서주(河西州, 溟州:강원도 강릉)을 두었다. 그리고 전국에 117개의 군과 293개의 현을 설치하였다. 679년 2월에는 원래 백제에 속했던 탐라국(제주도)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신속한다는 것을 다짐받았다.2)​ 

1) 삼국사기40 직관지 에 의하면 外司正은 모두 133명으로, 18, 115명이 배치되었다. 외사정(外司正)133명이다. 문무왕(文武王)13년에 두었다. 관등()은 알 수 없다.

2)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9제도가 신문왕 5(685)에 완비되었다고 하였으나 실제 9주가 완성된 것은 일선주를 폐지하고 다시 사벌주를 둔 687년이었다. 경덕왕 16(757)에 지명을 한자식으로 많이 고쳤는데, 이때 9주의 이름도 고쳤다. (겨울 12월에 사벌주(沙伐州)를 상주(尙州)로 고치고, 11030현을 거느리게 했다.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로 고치고 11소경 1234현을 거느리게 했다. 청주(菁州)를 강주(康州)로 고치고 11127현을 거느리게 했다. 한산주(漢山州)를 한주(漢州)로 고치고 11소경 2746현을 거느리게 했다. 수약주(水若州)를 삭주(朔州)로 고치고 11소경 1127현을 거느리게 했다. 웅천주(熊川州)를 웅주(熊州)로 고치고 11소경 1329현을 거느리게 했다.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로 고치고 1925현을 거느리게 했다. 완산주(完山州)를 전주(全州)로 고치고 11소경 1031현을 거느리게 했다. 무진주(武珍州)를 무주(武州)로 고치고 11444현을 거느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