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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의 통일신라시대 문화

상세정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골품제에 바탕을 둔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유교적인 정치를 심화시킨 것이었다. 왕권의 집행기관이던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으로 시중(侍中)이 설치된 것이며, 태종 무열왕이 비담(毗曇)과 알천(閼川)등 귀족 세력을 누른 것도 왕권 안정에 기여하였다. 특히 문무왕(文武王)을 거쳐 신문왕(新文王)에 이르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귀족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국학(國學)을 세워 유교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9주 5소경을 두어 신문왕 5년(685년) 확대된 영토에 대한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때 설치된 9주는 사벌주, 삽량주, 청주, 한산주, 수약주, 하서주, 웅천주, 완산주, 무진주이다. 5소경은 북원경(원주),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이다. 당시 주(州)와 소경(小京)은 행정적인 의미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강하였는데, 이 당시에 설치된 9주 가운데 춘천이 수약주(首若州)였다. 그러니까 춘천지역은 개편 전에 우수주였던 것이 이때 전국적인 행정제도 개편에 의하여 수약주(삭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9주는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각각 3주씩 두었고, 5소경은 군사 행정상의 요지에 설치하여 수도 경주의 지역적 편재성을 보완하고 중앙귀족과 지방귀족의 일부를 옮겨 살게 하였다. 주(州) 밑에는 군(117개)과 현(293개)을 두어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고, 외사정(外司正)이라는 감독관을 보내 감찰의 임무를 맡겼다. 

신문왕은 정무분담기구로서 통일 전에 두었던 6정(停)이라는 부대를 9개의 서당(誓幢: 중앙군)과 10개의 정(停: 지방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9서당은 9州의 지방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통일신라 하대에는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권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패한 김주원과 같은 일부 세력들이 춘천지역으로 이주해 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의 왕권과 중앙집권화는 8세기 초의 성덕왕(聖德王 702∼737)과 8세기 중엽의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경덕왕 때에는 중앙관원과 지방 9주의 칭호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우리나라의 고유한 지명이 중국식 지명으로 바뀐 것이 이때부터이다. 즉 경덕왕 16년(757년) 12월에 전국의 주군명(州郡名)을 개정함에 따라 수약주는 삭주(朔州)로 고쳐져 1주·1소경·11군·27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신라 말에 한 때 광해주(光海州)로 바뀌어 고려 초까지 이 명칭으로 불리워졌다.

8세기 중엽 경덕왕 대까지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8세기 후반기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즉 중앙의 진골귀족들 사이에 권력쟁탈이 벌어지고, 지방에서는 지방대로 원심력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지방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지방 세력의 부류는 여러 부류가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이고 이들은 나중에 후삼국시대를 열어간 장본인들이다. 궁예가 춘천지역을 장악한 후1) 신라의 군읍명이 비루하다 하여 모두 개명하였는데, 이때 춘천의 지명도 고쳐진 것이 아닌가 한다. 

요컨대 삼국시대에 춘천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일대는 수계에 의한 교통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철기시대부터 토착세력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언제부터 존재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좀 더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 지역의 자연적인 요소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평야지대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 사회발전에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가 팽창하면서 어느 시점에 한강 하류의 세력들이 중상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고구려가 남쪽으로 그 팽창의 방향을 전환할 때 진출하는 루트 중의 하나가 평강과 회양을 지나는 북한강 상류의 수계에 의해서 남한강 수계 지역과 연결되어 일부는 충주로 진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영역으로 인식되면서 이 지역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고구려의 문화적인 세례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신라는 6세기초 지증왕(500~513)·법흥왕(514~539)대에 이르러서 왕권을 강화하고 지배체제를 견고하게 하였다. 이때 王京과 지방에 걸쳐 존재한 다양한 지배세력을 대대적으로 재편성하면서 집단적인 신분제도를 성립하였다. 골품제가 집단적인 신분제라면 관등제는 개인이 관료조직 안에서 차지하는 서열을 표시한 것이다. 신라에서 중앙행정관부가 설치되고 행정을 전담하는 관직을 두기 시작한 것 역시 6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중앙행정관부가 설치되기 이전의 행정 운영체계에 관해서는 「냉수리비」나 「울진 봉평비」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 비문에 보이는 「차칠왕(此七王)」이나 전사인(典事人) 등의 관료들은 회의체에 참여하여 결정하는 층과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층의 두 집단으로 뚜렷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5세기 후반 이후 기존에 설치했던 간접지배 방식에서 벗어나,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행정 규모는 엄청나게 커졌다. 게다가 주변 세력과의 접촉이 확대되면서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이 빈발하였고, 그에 따른 군사적인 수요가 높아졌다. 농업생산력도 향상되어 경제규모도 그 이전에 비해 늘어났다. 중앙 관부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이 병부였다. 법흥왕 4년(517년)에 병부가 설치되었다. 병부는 처음 설치되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비중이 높아졌다. 이는 신라의 성장과 발전이라는 당시 대내외적인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후 신라는 진평왕대에 관제를 개혁하여 중앙통치조직을 정비하였다.

신라에서 행정조직이 미발달한 상황에서는 국가 경영의 기본적인 사항들은 회의체를 통하여 결정되거나 집행되었다. 회의체는 행정관부가 설치되기 이전 그와 같은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행정관부가 정비되어 가면 회의체의 역할이나 기능은 축소되었다. 이런 회의체의 존재는 「냉수리비」나 「울진 봉평비」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회의체를 통해서 공동으로 결정하고 공동으로 집행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합좌제도는 고대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적인 제도이다. 신라의 대표적인 회의제도가 화백회의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의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정치 적인 측면에서 골품제에 바탕을 둔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유교적인 정치를 심화시킨 것이었다. 왕권의 집행기관이던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으로 시중(侍中)이 설치된 것이며, 태종 무열왕이 비담(毗曇)과 알천(閼川)등 귀족 세력을 누른 것도 왕권 안정에 기여하였다. 특히 문무왕(文武王)을 거쳐 신문왕(新文王)에 이르러 왕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 귀족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국학(國學)을 세워 유교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9주 5소경을 두어 신문왕 5년(685년) 확대된 영토에 대한 지방 통치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때 설치된 9주는 사벌주·삽량주·청주·한산주·수약주·하서주·웅천주·완산주·무진주이다. 5소경은 북원경(원주)·중원경(충주)·서원경(청주)·남원경(남원)·금관경(김해)이다. 당시 주(州)와 소경(小京)은 행정적인 의미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도 강하였는데, 이 당시에 설치된 9주 가운데 춘천이 수약주(首若州)였다. 그러니까 춘천지역은 개편 전에 우수주였던 것이 이때 전국적인 행정제도 개편에 의하여 수약주(삭주)로 명칭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9주는 옛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 각각 3주씩 두었고, 5소경은 군사 행정상의 요지에 설치하여 수도 경주의 지역적 편재성을 보완하고 중앙귀족과 지방귀족의 일부를 옮겨 살게 하였다. 주(州) 밑에는 군(117개)과 현(293개)을 두어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고, 외사정(外司正)이라는 감독관 을 보내 감찰의 임무를 맡겼다. 

신문왕은 정무분담기구로서 통일 전에 두었던 6정(停)이라는 부대를 9개의 서당(誓幢: 중앙군)과 10개의 정(停: 지방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9서당은 9주의 지방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통일신라 하대에는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권쟁탈전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패한 김주원과 같은 일부 세력들이 춘천지역으로 이주해 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의 왕권과 중앙집권화는 8세기 초의 성덕왕(聖德王 702∼737)과 8세기 중엽의 경덕왕(景德王, 742∼765) 때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 특히 경덕왕 때에는 중앙 관원과 지방 9주의 칭호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우리나라의 고유한 지명이 중국식 지명으로 바뀐 것이 이때부터이다. 즉 경덕왕 16년(757년) 12월에 전국의 주군명(州郡名)을 개정함에 따라 수약주는 삭주(朔州)로 고쳐져 1주·1소경·11군·27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신라말에 한때 광해주(光海州)로 바뀌어 고려초까지 이 명칭으로 불리워졌다.

8세기 중엽 경덕왕대까지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8세기 후반기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즉 중앙의 진골귀족들 사이에 권력쟁탈이 벌어지고, 지방에서는 지방대로 원심력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지방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지방 세력의 부류는 여러 부류가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궁예와 견훤의 세력이고 이들은 나중에 후삼국시대를 열어간 장본인들이다. 궁예가 춘천지역을 장악한 후1) 신라의 군읍명이 비루하다 하여 모두 개명하였는데, 이때 춘천의 지명도 고쳐진 것이 아닌가 한다.

역사에서 한 국가가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군사조직의 정비가 우선이다. 집권화되기 이전의 신라 군사조직으로는 6부병과 지방의 성과 진에 편성된 병력이 있었다. 6부병은 6부인으로 편성된 부대로서 신라 초기의 영토확장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지방의 성과 진에도 왕경인으로 편성된 군부대가 주둔하였다. 성과 진의 병력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피정복민의 반란에도 대비하였다.

城과 鎭에는 왕경인 뿐 아니라 지방인으로 편성된 군사조직이 있었다.

 

탈해이사금 8년(64년), 가을 8월에 백제가 군대를 보내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했다. 겨울 10월에 다시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자 왕이 기병 2천을 보내 공격해 패주시켰다.

 

이 사료를 비롯하여 이후에 나타나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왕경에서 출동하는 신라의 군사조직이 보병과 기병으로 편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2세기 이후 경주지역의 고분에 매납된 무기와 무장의 출토 양식과 대체로 일치한다. 진흥왕 5년(544년)에 신라는 전국적인 규모로 보병군단인 6정과 기병군단인 10정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들 군단의 편성은 6세기 전반 이전에 이미 중앙과 지방에 배치되었던 군사조직을 근간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직관지 무관조에 따르면 6정은 대당(大幢) · 상주정(上州停) · 한산정(漢山停) · 우수정(牛首停)· 하서정(河西停)·완산정(完山停)으로 대당은 진흥왕 5년에 상주정을 13년에 설치되었으며, 한산정은 본래 신주정(新州停)이었고, 우수정은 본래 比列忽停(비열홀정)이었으며, 하서정은 본래 실직정(悉直停)이었고, 완산정은 본래 하주정(下州停)이었다. 신주정은 진흥왕 14년에 하주정은 16년에 비열홀정은 17년에 각기 설치되었다. 하서정은 본래 실직정인데 무열왕 5년(658년)에 파하고, 하서정을 두었다고 전한다. 신라 중고기 보병군단인 6정은 진평왕 20년(598)경에 그 설치를 완료하였다. 이같은 6정의 설치과정이나 설치 이후의 이동과정은 당시 신라의 영토 확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육간대청정 외에 신라 중고기에 전국적인 규모로 편성된 기병 군단으로 10정이 있었다. 10정군단은 기병부대인 10정과 그 예하 지원부대인 삼천당(三千幢)으로 조직되었다. 10정은 음리화정(音里火停, 현 경북 상주 청리)· 삼량화정(參良火停, 현 경남 밀양 삼량진)· 소삼정(召參停, 현 경남 함안 죽남면)·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현 전남 나주 남평면)· 남천정(南川停, 현 경기도 이천 읍내면) 骨乃斤停(현 경기도 여주) 벌력천정(伐力川停, 현 강원도 홍천) 이화혜정(伊火兮停, 현 경북 청송 안덕면) 등 모두 10개 기병부대로 조직되었다. 10정의 병졸은 모두 4품 이상의 왕경인으로 편성되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10정이 진흥왕 5년(544)에 모두 설치되었다고 한다. 5세기 중반 이후에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각종 마구와 기병용 갑옷과 투구가 6세기 중반경에 기병군단이 창설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진흥왕 5년에 모두 설치되었다고 하나, 이는 더 고찰해 보아야 한다. 강원도 홍천에 설치되었던 벌력천정은 안변의 비열홀주가 두어진 같은 왕 17년 이후에나 편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10정은 진흥왕 5년에는 음리화정·삼량화정·소참정·이화혜정 등 4개의 정을 창설하고, 17년경을 전후하여 남천정 골내근정 벌력천정 등 3개 정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백제영역을 거의 장악한 문무왕 5년(665)경에 나머지 고량부리정 거사물정 미다부리정 등 3개의 停을 설치하여서 완료되었을 것이다. 10정 역시 6정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영토확장 과정에 비례하여 설치되었다. 아울러 이는 10정이라는 騎兵군단이 신라의 삼국통일 달성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 밖에 삼국통일 이전에 신라가 설치한 군사조직은 시위부 계금당 이궁 서당 낭당 등이 있었다. 시위부는 궁성의 숙위와 국왕의 호종 및 경호를 담당하였다. 계금당은 기병부대이다. 계금당은 王京을 중심으로 활동하엿다. 이계당(二罽幢)은 한산주 계당은 문무왕 17년에, 우수주 계당은 문무왕 12년에 창설되었다. 계금당과 이계당의 병졸은 모두 4두품 이상의 기병ᅇᅳ로 편성되었다. 이궁(二弓)은 외궁(外弓)이라고도 하며 漢山州弓尺은 진덕왕 6년(652)에 하서주 궁척(河西州弓尺)은 진평왕 20년에 각각 창설되었다. 활을 주무기로 하는 부대였다. 서당은 보병 부대였다.

대규모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에는 행군을 편성하였다. 행군조직에는 왕의 명령에 따라 6정의 병력 뿐 아니라 10정과 법당의 조직을 편제하였다. 행군조직은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편성된 임시군단이었으므로 전쟁이 끝나면 해체하였다. 행군조직에 편성된 6정 10정 법당 등의 군단은 진군조직으로서 일정한 지역을 배경으로 계속 작전을 수행하였다. 신라의 군사조직은 군사행동을 수행하는 과정을 조감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구성되었다.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시점에서 군사조직의 양적 팽창이 최고조에 달하였을 것이다. 

중앙군 가운데 일부는 지방군과는 통수체계를 달리하여 변방에도 배치되었다. 6停 가운데 한산정 우수정 하서정 완산정은 그 설치 이래의 경위로 보아도 그렇고 그 이름을 보아도 그러한 바와 같이 광주(廣州), 춘천, 강릉, 전주와 같이 왕경(王京)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들에 주둔시켰다. 이것들은 도독의 지휘 밑에 있는 지방군과 협력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방군을 견제하는 역할도 담당하였을 것이다.

지방군은 대체로 州의 도독의 지휘 밑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이 있다. 지방군의 배치정형으로 보아 그것이 다만 외부로부터의 공격에만 대비한 것은 아니고, 이전 고구려, 백제 지역과 유사시에 있을 반란에 대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군사통치체제도 왕권중심적인 집권체제를 확립하는데 큰 진전을 보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이나 당 등의 부대들에서는 군역을 지는 모든 장정들이 골고루 배치된 것은 아니었다. 부대들 사이에서는 병종에서의 차이, 중앙군과 지방군의 차이들이 존재했다. 군역에 동원될 때에는 15살 이상의 장정이 동원되었을 것이나 실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하는 군정은 20살 이상의 남자 장정이 병역부담을 졌을 것이다.

골품제에 의한 신분적 규제가 심하였던 신라에서는 어떤 것들은 세습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축성한 성은 25개에 달한다. 이들의 배치를 보면 축성사업에 주로 수도 주변의 산성을 비롯하여 지방 중심도시들과 그 주변의 산성들이었다. 영토확장과 관련하여 북방 방어를 위한 축성이거나 왜군을 대비한 축성을 하기도 하였다. 수군무력도 강대하였으며, 해상 교통도 발전하였다.

통일신라에서의 지방행정 및 군사제도 편성과 그 유지 강화에서 王京을 중심으로 한 도로, 역참, 봉수망의 형성은 주요한 의의를 지닌다. 『삼국사기』 지리지 미상지(지명만 있고 분명치 않은 곳)조에 보이는 다섯 개의 통(通)은 왕경에서 5개 방향, 특히는 9주 5소경과의 연결을 위한 군사 및 행정상 중요한 간선도로였을 것이다. 5통은 북해통, 염지통, 동해통, 해남통, 북요통으로서 그 중 북해, 동해, 해남의 3개 통은 해변에 연접한 방향으로 뻗은 도로였을 것이다. 

변방에서 일어나는 사변들을 제때에 알리기 위해 마련한 봉수체계도 삼국시대의 것을 이어 정연하게 정비하였다. 도로, 역참, 봉수체계는 지방행정 및 군사제도로서의 중앙집권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도로, 역참체계는 전국의 물자가 왕경으로 집중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보급망이었다.​​